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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념공덕과 그 사회적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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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연호 작성일2012.09.28 조회4,449회 댓글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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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8월 26일, '삼보법회 하기 아카데미'에 강사로 초빙되어 강설한 원고입니다.
우리 박호석 대불련 선배님의 추천으로 강단에 서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진부한 내용이나마 대불련 활동을 언급한 내용이라 실어 봅니다.
다소 긴 글이지만, 관심 있으신 동문들의 일독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一念功德과 그 사회적 실천 김연호(우리는 선우 제천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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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충북 제천에서 동물병원을 주업으로 하면서 불교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동물병원도 돈이 많이 안 되는 한우만 보면서 어느덧 일 갑자의 세월을 먹었습니다.
 

이 무슨 운명인지 1972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와 인연한 이후 지금까지 잠시도 불교운동을 쉬어본적 없이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에 묻혀서 아쉬운 저의 청춘은 다 지나 가버렸지만, 그 세월 속에서 우리불자들의 직분인 일념공덕의 마음은 다소 얻어 가고 있는 것 같아 위안이 됩니다.
주위 분들은 저를 두고서 ‘참 팔자다’ 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저는 팔자도 길들이기 나름이 라고 하는 말에 동의합니다.
1976년 대학을 졸업하고서 공무원으로 제천군청에 발령을 받고서 그야말로 눈물이 쏙 빠지도록 외롭고도 낯선 타지인 제천에서의 생활 3일 만에 불교청년회의 재건에 나섰고, 6개 월 뒤에 불교학생회와 불교거사림회, 우리는 선우 등을 순차적으로 직접 창립시켜 불교운동을 해오는 동안 하루에 두어 시간 이상은 불교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고뇌를 멈추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사는 게 “불교를 위함인가, 나를 위함인가”란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가정과 사회생활 속에서 무언가의 자비정신이 체험된 불자의 진면목이 보여야지, 그저 불교를 위한 투쟁가처럼의 인상이 비춰서는 안 되는데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이 떠나지를 않던 중인 1981년 저의 큰애 첫돌을 맞았습니다. 그 기념으로 당시로선 거금인 36만원을 들여서 구입한 탄허스님의 역주인 신화엄경합논을 아침마다 한 시간씩을 읽어 3년 만에 끝을 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시작 된 아침예불은 지금껏 매일 걸러지를 않으면서 내가 불자라는 마음의 순간을 잊지 않으려 노력 해 오고 있습니다.
저는 탄허스님의 “眞을 돌이켜 俗으로 나아가고, 智를 돌이켜 悲로 나아 갈 새 回向이라는 大華嚴 논지의 말씀을 가슴에 떠올릴 때마다 무언가의 歡喜心을 느끼곤 합니다. (불교의 사회성)
이를 실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서는 그 화엄의 진리는 내 것이 될 수가 없음은 물론 불교 지도자로서의 자신감도 서지를 않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나를 따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잠시 후에 이야기 하고자하는 20여년 을 수집한 문화재를 국가에 기증한 동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진실에 대한 자신을 좀 얻기는 했었습니다. 허나 과연 이것 만 으로 서 불자라고 하는 저의 삶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을까 하는 반성에는 쉼이 없었습니다.
이 무렵 저의 생애에 가장 큰 충격이 있었습니다.
34세에 풍 병을 얻어 아름다운청춘의 꿈도, 외출도, 돈도, 구경거리도 모두 병에 차압당하고서 자식들 때문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72세까지 버티어온 저희 어머니의 생의 종지부 앞에서 저는 그동안의 불효의 한에 일 년 동안을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현실이 된 육친의 이별은 가슴이 빈 것 같이 너무도 스산했었습니다. (이때 불교는 직접적인 신념을 심어주는데 소홀하다...)
그렇게 일 년을 방황하던 어느 날 결심을 얻은 것이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하루에 2천배씩 50일간 10만 배의 기도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얻자 곧바로 발원문을 쓰서 부처님 전에 올리고서 향불을 올렸습니다. 향 연기는 관세음보살님을 휘감고서 오르다 사라졌습니다.
뒷날 새벽부터 절을 하는 동안 땀도 눈물도 많이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에 비례한 만큼 눈과 얼굴은 맑아지고 고질적인 변비와 위장병은 씻은 듯 나아졌습니다.
이 50일간의 10만 배 기도일기를 문학지에 공개하자 재천에서의 20명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10만 배 붐이 한동안 일어나기 시작했었습니다. (2001년)
이후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눈길은 달라 보였었고 저 또한 남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해졌습니다.
또한 곧 달라이라마존자를 1백분 간 친견할 수 있었는데 저는 이를 10만 배의 공덕이라 믿고 있습니다. “남을 도와라, 남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하라, 그리고 친절하고 온화하라, 이것이 가장 좋은 현대인의 수행법이다.”라고 저의 물음에 답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일념으로 공덕을 쌓지 않으면 자비는 보이지를 않고 영혼은 담기지를 않는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 불교의 지상과업이 포교이고 보살로서의 회향이 염원이라면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을 내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놓아 중생을 이롭게 하는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더욱 뚜렷이 눈에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불사에도 순서가 있다. 지금은 군의 포교가 제일 접근성이 있는 황금어시장이다.))
하나만 더 이야기 하고서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15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저희 애 두 놈이 대학을 가기 위하여 차례로 집을 나설 때 저는 부처님을 싸서 보내면서 “앞으로는 너들 기도는 너들이 직접 하거라. 그리고 반드시 대학생불교연합회를 찾아 갈 것”을 간곡하게 일렀습니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서 첫 봉급을 받기가 무섭게 다달이 자동이체로 1만원씩 인연 지어 진 불교단체에 내게 한 것이 10년이 다되어 가는 지금 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나의 생활이 부처님의 말씀을 통하여 행복한 만큼 우리자식에게도 그렇게 살아지게 하고자하는 원력을 심어주려는 의지가 없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암담하고 삭막해 질 것입니다.
 

저는 하루 수입의 10프로는 반드시 항아리에 떼어놓고서 우리는 선우와 불교학생회 군인법당과 대불련동문회, 형편이 여의치 못한 이웃 등에 사용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럼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체험된 것이 가슴 깊숙이 문신처럼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잘 이야기 하지를 못합니다. 또 잘 알지도 못하고 논리도 없습니다.
혹 어느 자리에서들 저를 두고 지인이 소개를 할 때입니다. 이분은 몇 십억의 유물을 국립청주박물관에 기증 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워 주곤 합니다. 기증은 사실이지만은 몇 십 억 에는 도저히 못 미치는 평가액일 것이고, 이일도 1차기증이 1990년이고, 2차기증이 2002년이라서 세월이 상당히 지났기에 지금은 기증에 대한 저의 감정은 색이 많이 바래 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색깔은 역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소위 영양가가 있고 흥미가 묻어있지 않으랴 싶어 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가 나서 성장한 곳은 경남 하동군 진교면에 있는 두메 산골마을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부모님을 잘 만난 덕분에 진주에 있는 국립경상대학 수의과를 무난히 다닐 수 있었던 것을 항상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과 추모의 정으로 매일 아침마다 예불시에는 부모님의 영정사진 앞에도 3배의 절을 올리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곤 합니다. 이 순간 마다 저희 아버지께서 생전에 자주 하셨던 ‘뭐든지 다 때가 있는 법이다’는 말씀을 떠올리곤 합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좋은 일을 하는 것도 다 때가 있다.’ ‘이 때란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나가는 때를 만났을 때 정신 바짝 차리고 단단히 해야지 한번 놓치면 평생 고생이다.’ 고 누누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저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자식을 키우고 공부를 시키다보니 인생에 있어 이 말씀만큼의 금과옥조가 어디 또 있으랴 생각되어집니다.
일개 농부의 삶이었지만 얼마나 자식들을 위하여 생각하며 고뇌하고 살았으면, 그토록 산 진리의 말씀을 쉼 없이 일러 주었을까, 생각사록 존경심이 더하곤 합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담고서 생활하던 대학시절이었습니다.
하루는 우리 고향 마을에서 30여리 떨어져 있는 다솔사란 절엘 여러 개의 재를 넘어 걸어서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1973년 겨울로 생각됩니다.
그곳엔 왜정 때 한용운 시인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고, 제헌국회의원도 지내시고 해인대학[경남대학 전신]을 설립하여 학장을 지내신 당대의 큰 선지식인 효당 최범술 스님이 주석하고 계셨습니다. [당시70세]
스님은 당시 독서신문에 “한국의 다도”를 연재하여 우리의 것을 갈구하던 식자층으로 부터 인기가 대단했었습니다.
전 젊은 혈기 하나 만으로 겁도 없이 스님의 처소를 불쑥 찾아가서 큰 절을 올린다음 “스님, 다도와 멋이 어떻게 통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은[그때 백담사에 세울 한용운 비문을 쓰고 계셨습니다.] 붓을 든 채 좀 당돌하고 도 불안해 보이는 저를 힐끗 한번 쳐다보시곤 잠시 무언가를 생각 하시는 듯 했습니다. 그리곤 첫 말씀이 ‘신발은 바로 벗고 들어왔느냐’, ‘문을 가만히 열었느냐’, ‘살피고 앉았느냐’ 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평범하고도 간단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전 바로 잠시 전의 움직임에 있어서도 답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스님은 더 이상의 말씀은 없이 차만 계속 잔에 부어 주셨습니다.
두꺼운 느티나무 판의 탁자 위엔 골동품 같은 차관, 찻종, 차 통, 그리고 옆에 놓인 숯 통과 함께 화로 위의 무쇠주전자에선 물이 쏴-하는 솔바람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고풍스럽고 안온한 분위기였습니다.
또한 방 사면에는 고서들로 꽉차있었는데 그 사이로 몇 점의 고서화들이 걸려있었습니다. 벽의 상단 한 자리에는 일반인의 상식으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예수님과 마호메트의 사진액자도 걸려있었습니다. [위대한 성인은 누구한테나 존경 받아야 된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우리의 전통 차에 대한 아무상식도 없이 젊은 객기 하나로 차와 멋을 알겠다고 찾은 죽로지실에서 알듯 말듯 한 화두만 받고서 산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 그 자리에서 무언가의 영감을 얻었고, 이후, 나도 앞으로 저렇게 살아보았으면 하는 멋과 이상을 향한 동경심을 가슴속에 품게 되었습니다.
전 가끔 그 시절 그때 그 자리에서 인격과 멋의 빛깔이 은은하게 묻어나던 한 시대의 거인 효당과의 만남은 저의 생애에 참으로 큰 행운 이었구나 하고 되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청주에서 열린 전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지부장의 회의 참석 인연으로 제천 군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제천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젊은 아가씨들을 50여명 모아놓고 다도의 강좌를 마련하게 된 것과 제천의 역사 찾기에 나서게 된 게 바로 효당 스님과의 인연의 영향이고 보면 그렇습니다.
애당초 한 6개월 만 충북 땅에 살다가 고향으로 내려가리라고 마음먹었던 계획은 7개월 만에 공무원생활을 끝내고, 동물병원을 개업하면서 서서히 접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저의 운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1977년 6월에 개업을 하고보니 공무원 때보다 월수입이 다섯 배 정도가 늘어났습니다. 이 무렵, 제천에 골동품 수집바람이 막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전국적인 현상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때 십 여분이 수집대열에 본격적으로 나섰는데, 주로 의사들이고 은행지점장, 공장장 같은 제천지역의 유지 분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는 보따리 골동상인 들이 많았고, 충주댐 건설로 수몰지역의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팔고 가는 유물을 낮에 거두어들여 저녁에 가져와서 보이는 장사군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의 하루가 멀다하게 골동품을 가득 담은 가방을 들고서 찾아들 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만히 앉은자리에서 풍족하게 감상하면서 느긋하게 구입 할 수 있는 참으로 그리운 한 시절 풍경이었습니다. 이젠 그런 꿈같이 푸짐하고 소박하던 시절이 다시 돌아 올 수 없다는 사실에 쓸쓸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 유물들 중에 제천과 관계되는 모든 것과, 땅속에서 갓 출토되어 5백년 잠에서 막 깨어나 다시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그야말로 처녀성을 지닌 도자기들의 매력에 푹 빠져 들었습니다. 보는 대로 다 갖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자료도 되고 나이도 있고, 완전하고, 색깔도 고운 즉 제반 조건을 고루 갖추어 귀족적인 맛이 묻어나는 것은 가격의 벽이 너무도 높았습니다. 이는 보는 것만으로 족해야 하고 소유는 엄두도 못내는 저의 가난한 경제적 현실은 큰 고통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전 이때 나의 분수를 알고서 중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결심을 굳게 가졌습니다. 소위 뱁새가 황새 따라서 갈려다 보면-------.[분수를 알고 족 함을 알 때에 무소유이다. 유행을 따르다보면 교만해진다. 이는 무소유가 아니다.]
 

당시 산부인과를 하던 돈 많은 의사 분들이 몇 백만 원짜리 골동품을살 때, 송아지 난산을 처치 해주고 겨우 얼마씩 받아서 사는 수의사인 저는 1.2십 만 원짜리를 사놓고서 이를 감상하며 자족 하야 하는 소위 하발 치기 수집가 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만원, 십 만원 이란 작은 돈을 주고 사더라도 앞으로 반드시 제값은 지니고 있을 쏠쏠한 유물만을 사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로선 이것만이 유일한 경쟁력 이었습니다. [귀얄분청 병, 수저, 명기, 청동기 자료 등 안목대결, 진품명품의 이상문도 그때 저의 안목을 높이 사다.]
 

저의 30대 초반이었던 당시, 아직 우리 집 애들도 어려서 생활전반에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가지 않을 때라 여유가 좀 있었습니다. 전 그 여유 돈으로 일수 금을 찍 듯 거의 날마다 골동품 수집에 젖어 있었습니다. 일종에 중독 이지요.
 

고려청자, 조선백자, 청동기, 고서화, 목기, 민속품 등등 아주 다양하게 수집했습니다.
전 당시 골동품을 감상 할 줄을 모르고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교양인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극심한 편견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혹 부잣집을 방문했을 때에(당시) 거실에 수많은 감사패는 진열되어있어도, 벽에는 ‘하면 된다.’ 던지, 고양이 사과 굴리는 등의 액자가 걸려있으면 저 사람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잘난 척하고 살지 싶었습니다. [지성이나 부를 갖고 잘 산다는 것은 그 분의 처소에서 무언가의 지적인 품위의 향기가 스미어나야 하고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 시각이 팽배했던 전, 선조들의 손길이 닿은 유물이라면 돈이 조달되는 대로 마구 사드리다 시피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양이 너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 만물상 같이 사들일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분야의 유물에 전문성을 갖고 골몰한다면 더욱 값진 소장가가 되지 않으랴 하는 점을 가리 늦게 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셨고 茶道의 대가인 예용해 선생께서 우연히 우리 집을 방문하셔 자기는 표주박 만 모았는데 그 하나를 사려고 충무까지 간적도 있었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신 게 직접적인 자극제가 된 듯싶습니다.
 

그 때서야 눈을 돌리게 된 것이 제천에도 두 군데나 가마가 있었던 조선초기의 분청사기 이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좀 늦은 편이었습니다. 이미 소장자가가 많아진 분청사기의 인기는 상종가를 치고 있었습니다.
우리 도자기사에 그래도 우리 것이라고 내세울만한 것은 분청사기이며, 그 중에서도 분청사기철화문[일명계룡산, 공주 반포면 학봉리의 가마에서 생산] 이라고 합니다. 이는 왜인들이 이미 다 도굴해 가버리고서 당시로선 겨우 남은 것을 이삭 줍기나 하는 정도 이었습니다.
당시 한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의 도자기유물이 양으로 치면 국내에 있는 것 두 배, 질은 백배가 좋다고 합니다.
 

당시 제천에선 태토와 발색 문양이 좋은 질 높은 분청사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어느 분의 말씀이 한 달에 용달차 한 대정도의 분량이 출토되어 빠져 나간다고 까지 귀 뜸을 해주었습니다.(매장, 복장이 역사를 지켜주다)
 

그래서 궁리 끝에 대리 만족이라도 할 심정으로 당시(30년 전) 제천에서 잘나가던 돈 있는 불자인 사장 두 분을 차례로 찾아갔습니다.
‘사장님 지금 한 3억만 투자하여 제천에서 출토되는 분청사기를 막 사들여 놓으면, 언젠가는 제천에 국내유일의 훌륭한 분청사기전문박물관을 세울 수 있을 것이고, 그때는 당신이 대단해질 것입디다.’라는 고급정보를 무상으로 제공해 주면서까지 오히려 애원을 하다시피 권한 적이 있습니다. [기관장 초청 간담회에서도 두 차례]
그러나 순진하고 젊은 저의 말은 설득력을 얻는데 무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의 실세가 권했더라면 가능 했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이렇게 제천의 유물들에 매혹되어 광적이라고 할 정도로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같이 출발한 다른 분들은 다들 채 1.2년을 못가서 중도에 하차하고, 밑천이 늘 달랑 달랑 하여 구차하게 살던 저만 외롭게 남아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하나같이 골동상인들의 가짜와 시세바가지 등의 배신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한번 속아 본분이라면 충분이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골동품이란 꼭 같은 것이 한 점도 없고 보면 자기만이 천하에 둘도 없는 귀하고(도산의 서) 좋은 것을 샀었다고 흥분해있다 어느 시점에 이것이 가짜거나 턱없이 비싸게 사게 되었다는 사실에 꿈을 깨는 순간 낙망하지 않을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전 꼭 그렇게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또다시 이를 악물고서 노력했습니다.
이세상은 때론 속기도하고 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일진대, 이를 빨리 인정 할 줄 알 때 승자가 된다는 사실 앞에서였습니다.
저라고 어찌 속는 충격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충격 속에 걱정은 클수록 약이 된다고 해요. 큰 변화를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없는 인생은 낙오입니다.
전 더 이상 속지 않으려고 구입한 유물을 앞에 두고 여러 날을 보고 또 보면서, 책을 뒤적여 가며 역사의식과 미적안목을 기르려고 노력한 것이 이후 큰 수확으로 남아 있고 보면 그렇습니다. 심지어 애들보고 그림도 그리게 했습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 “고생을 감수하면서 고뇌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불교를 알려하고 실천해보려 너는 얼마나 노력을 다했느냐.) “있다면 그 중량은 매우 가벼울 것입니다.” [하물며 중국속담에는 고생을 떠나면 돈도 떠난다.]
 

우리가 살면서 사물에 대한 관조와 안목의 능력은 늦어도 30대 안에 훈련되고 길러져야지 아무리 영리한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시기를 놓치게 되면 감정과 감각이 무디어져버려 노력에 비례한 만큼 열리지를 않습니다. 불교는 더욱 그렇습니다. 젊어서는 구도하고 나이 들어서는 베풀어야 영혼이 얻어지는 올바른 순서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개 4,5십 대에 시작한 문화재 수집가는 부의 축적을 위한 소장일 뿐, 그 속에서 역사의 맥박과 미를 발견 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전 이때 얻은 큰 교훈이 또 있습니다.
속는다는 것은 대단히 자존심상하고 또한 충격이지만. 그러나 이 현실을 두고 눈 딱 감고 참아내면 용케도 그 몇 배가 보상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자 인간관계이더란 것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지금 국립청주박물관의 저의 기증유물 상설전시관에 들어서면 진열장에 극진하게 모셔져 있는 분청사기 명문 합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 유물을 가져다준 골동상인, 저를 참 여러 번 속였습니다. 그러나 그 한 점으로 그동안 속인 것 수백 배의 보상을 해 준 셈입니다.
즉 일백만원 치 속이고 일억이 넘는 유물로 보상해준 편입니다. 자기도 모르게요.
그래서 “행운은 인내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기다림의 최후 순간에 온다.”는 말이 생겨 난 게 아닌가싶습니다.
 

만약에 참고서 기다릴 줄 아는 미덕을 저버리고는 ‘욱’ 하는 마음에 너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 배신자라며 모욕을 주고 고발 하겠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얻는 것은 하나 없이 남는 것은 깊은 증오와 감정의 골로 돌아올 수없는 강을 건너고서 업만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감정은 순간이고 순간은 사라지는 것인데,” “곧 사라질 순간위에다 원한을 남긴다는 것”은 아름다워야 할 인생에 또 하나의 손실이자 업장을 쌓는 과오가 아니겠습니까.
전 요즈음 저의 3.40대에 골동품의 수집을 향한 그 강한 에너지가 과연 어디에서 샘솟았을까 하고 스스로 되돌아보아질 때가 더러 있습니다.
 

한번은 꼭 샀으면 하는 유물이 하나 나왔는데 저의 자금줄은 이미 고갈되어 있었습니다.
궁리 끝에 용기를 내어 돈을 좀 가진 불자 지인 한분을 찾아가서 50만원만 빌려달라는 말을 참으로 어렵사리 끄집어냈었습니다. 그러나 ‘나 돈 없어’ 하는 한마디를 듣고서 쓸쓸하게 돌아서 나올 땐, 꼭 형 집에 양식 얻으려갔다가 얻어맞고만 돌아오는 흥부의 꼴처럼 저의 어깨는 축 쳐져있고 긴 다리는 휘청 그렸습니다.
 

이를 안쓰러워한 집사람과 이틀 밤낮을 머리를 맞대고서 찾아낸 묘안이 결혼 때에의 유일한 예물이었던 금팔찌를 환전 할 것에 우리부부는 서로 쾌히 동의하고서 성사를 시킨 적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는 엄동설한에 일주일을 연달아 밤에 잠도 한숨 제대로 못자고서 단양 과 영월로 가는 얼어붙은 험한 눈길에 생명을 걸고서 왕진을 다녀 그야말로 골병이 들게 벌인 돈으로 주둥이 깨진 분청사기철화문병 하나와 맞바꾸고서 허허롭게 웃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도 모자라 부동산이라곤 달랑 성냥 각만 한 집하나 있던 것은 노상 은행에 저당 잡혀 있었고, 들어가던 보험금들은 원금도 손해를 보아가며 해약하기가 그 몇 번인지 모릅니다.
 

부부는 동고동락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고들 하지만, 저희 부부에 있어서는 同樂은 남의 일이자 사치이고 同苦만이 유일한 인생인양 사는 동안 어느덧 청춘은 다지나 가버린 지금, 노후를 위함이란 의무적인 국민연금 외엔 타게 되는 보험이 거의 살아 있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왠지 별로 걱정이 들지를 않습니다.
 

요즈음 우리 또래들끼리 서로 모이면 다들 대통령과 정치인들에 욕은 참 잘도 하면서 정의로운 일에 지갑을 잘 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노후노후를 되게 많이 들먹입니다. 돈이 있는 분들일 수록 더합니다.
여기에 하는 말이 그래도 집 한 칸과 일천 여 평의 땅에 현금이 한 5억은 있어야 노후가 편안 할 것이라고들 참 편한 소리들을 하곤 합니다.
이런 소리 자주 하는 분들치고 건강하고 무사하게 오래 사는 분들 저는 별로 못 본 것 같습니다.
 

이토록 유물에 반은 성한 듯 반은 미친 듯 살아오던 1990년.
골동수집 15년의 세월 앞에서입니다.
 

골동품, 아니, 문화재, 우리 선조의 유구한 삶의 흔적이 케케히 묻어 있는 신비와 아름다움에 그 수집의 가치는 참으로 무한하지요.
누가 감히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 하겠습니까. [그렇기에 60여 년 전 중국의 국민당 정부의장개석 총통이 대만으로 망명할 때 네 대의 비행기(?) 가득하게 중국의 국보급 유물을 싣고 갔었고,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도 설산을 4개월 넘게 걸려 지고 넘어온 문화재(금동관음상을 조각내서 가져와 다시 이어붙이다.)를 망명정부 곳곳에 보관하면서 이를 통하여 티베트의 정체성을 심어 주고 있는 것을 저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문화재는 우리개인의 유한한 생명 앞에서는 일시적으로 보관관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영원한 소유는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로선 개인 소장의 한계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도난과 파손, 화재 등의 위험성을 항상 옆에 끼고서 집을 한시도 못 비우는 것은 물론, 한참 크는 애들을 장난도 못 치게 하면서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불안초조로 사는 것이 과연 행복인가 불행인가 하는 점이 자주 뇌리에 스치기 시작 했습니다.
 

그렇다고 저의 청춘을 송두리째 바쳐가며 벌인 돈으로 애지중지 수집 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게 모두가 제천과 충북에 살았던 선조들의 생활 문화와 연관된 것들을 금전으로 환전하여 애들 두 놈께 주식을 사준다던지, 아니면 부동산을 사두었다가 노후에 안분 자족하는 소시민적 안락도 어찌 저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게 과연 그토록 문화재를 사랑했던 소장가의 뒷모습이랄 수 가있을까 하는 갈등 앞에서 저의 양심은 요동을 쳤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제천에서의 나의 삶은 결코 이기적이지 않았는데. 이를 자칫 잘못 처리를 하게 되면 지금까지 비단결 같은 나의 인생여정에 파리똥 같은 오점으로 더렵혀지고 말 것인데 하는 양심이 긴급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간과 할 수 없었던 부분이 또 있었습니다.
저가 한창 골동품 수집에 열을 올리고 다른 정서적 생활에는 소홀할 때, 저희 집 애 두 놈도 한창 자라면서 이 세상의 이치를 보고 느낄 때였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진실 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지, 그렇지를 못하고서 정당하지 않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자식의 불행도 같이 자라게 된다는 만고의 진리가 서서히 저를 움켜 지었습니다.
[전 이 시기를 저의 인생에 있어 대단히 소중한 변화의 전환점으로 기록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이 무렵에 우리부부가 앞으로의 좌표에 나침반을 새로이 놓는 데에 쾌히 합의 하지 못했었다면 아마도 지금 이렇게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삼보법회 법단에 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볼 때 순간순간의 연속성위에 영원함은 존재하고 보면, 순간순간의 관심과 소중함을 뛰어 넘어 참된 나 자신의 삶의 무게는 찾아지기가 결코 어려울 것입니다.
 

“걱정은 변화를 유도한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현실을 걱정하는데서 아름다운 내일이 있다는” 진리에서일까요.
 

전 여러 날 동안 고심을 거듭한 끝에 찬란한 용단이 내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기증’이란 이 시대가 낳은 아름다운 단어 이었습니다.
 

그리곤, 개관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도내에 있는 국립청주박물관을 떠올렸습니다.
물론 진주에 있는 저희 모교인 국립 경상대학의 박물관이 앞서 생각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문화재란 원초적인 제자리를 멀리 떠나버리면 그 가치도 같이 떠나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증이 현실로 받아들여졌을 때 어느 한편으론 너무도 허무했습니다.
저의 가슴심연 까지 밀려드는 공허감은 마치 스산한 가을바람이 되어 스치는 듯 했습니다.
 

아니 내 인생에 도대체 ‘이것 다주고 무슨 재미로 산다 말인가’ 하는 감정이 저를 질기게도 부여잡았습니다.
이렇게 또다시 며칠을 갈등하는 동안, 저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영혼의 소리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 사랑 할 수 록 놓아 버려라, 놓아버릴 수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뇌리에 스치는 이성의 소리에 저는 드디어 깊은 통증이 가라앉듯 치열했던 갈등을 잠재우고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1990년 12월 13일 제천에 첫눈이 오던 날, 15년 동안 애지중지 수집한 360점을 모두 챙겨서 쭉 내놓았습니다. [이때가 거금의 빚을 지고서 막 이사를 한집에서 이었습니다.]
15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지도 헛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유물의 양과 질을 통하여 보였습니다.
대단합디다.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집 사람은 그래도 미련이 남았던지 탁구공만한 인화문분청사기 항아리 한 점을 집어 들면서 이것 하나만 자기를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욕심은 뭐 할라고 남겨놓느냐며 매정하게 시리 손을 내저었습니다.
 

잠시 후 친히 방문한 박물관장님과 학예실장님은 방안에 가득한 유물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니 제천이란 시골도시에서, 그것도 의사도 아닌 수의사가 문화재를 기증 한다고? 아마도 농촌에 왕진 갔었다가 주어다 놓은 옹기와 같은 민속품 정도이겠지 하는 사전 짐작이 없지도 않았던 것 같습디다.
그러나 그분들의 눈앞에 가득 펼쳐진 문화재들, 단 한 점도 가짜가 없이 모두 알토란같은 오백년. 일천년 충북의 선조들 혼이 배여 있는 유물에 적잖이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혹 기증의 결심을 번복하지나 않을까 하여 한 달간의 말미를 주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애원하다시피 하여 곧 바로 한 점 남김없이 백설의 길을 따라 국립청주박물관으로 실려 보냈습니다.
그 당시 국립박물관 역사에 유물을 기증한 예는 저가 6번 째였습니다. 그리고 다들 노후나 사후에 부모의 유지였다며 자식들이 대신 기증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저 같이 갓40의 나이에 들어선 젊은이가 기증한 사례는 세계박물관사에 처음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질과 양이 문제이기는 하겠지만요.
 

그리곤 청풍의 학현이란 오지의 마을에서 왕진을 요청키에 엇부루기 황소를 치료하기 위하여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쳐 가며 나섰습니다.
염방 호수로 미끄러져 들려 하는 그 위험한 눈길을 왕진요금 4만5천원에 생명을 걸다시피 하고 가던 저의 마음은 참 많이 썰렁했습니다. 준 것이 얼마인데? 이 고생을 하나 싶은 중생심이 고개를 든 것입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세탁기를 비롯하여 여타 가전제품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문화재를 향한 중독은 미처 끊지를 못하고서 10여 년 동안 다시 사서 모은 것을 2002년에 2차로 270점을 기증하고, 불교관계 문화재 5점은 오대산 월정사 박물관으로 보냈습니다.(국립박물관에 비해 사찰의 대접은 참으로 소홀했었다.)
 

이때 기자회견 자리에서입니다. 기증의 동기를 묻는 기자께 여러 말이 필요 없이“준 것은 남고, 가진 것은 없어진다는.” 말로 대신 했습니다. 이 한마디는 저의 작은 체험에서 얻어진 확신에 찬 압축된 언어 이었습니다. 그 말의 출처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자 그렇게 신문에 제법 크게 기사로 실려 나왔습니다. 불자라는 한마디를 얻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물 이었습니다.
 

지금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 관리되고 있으면서 특별상설관에 일부 전시되고 있는 저의 기증 유물들은 돈으로 치면 재벌 수집가들의 단 한 점 값에도 못 미치는 별스럽지 못한 것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분수에 맞게 알뜰하게 수집했던 것들이었기에 저와 같은 눈높이의 보통사람들껜 한 점 한 점 모두 정겹고 소중한 문화재 일 것 입니다.
 

이젠 저의 가슴에 남은 것은 불자로서의 진실에 대한 확신과 미적인 안목, 책 읽는 습관, 골동을 사기위해 일체의 생활을 간소하게 했던 만큼의 검소가 초로인생에 큰 보배로 남아있습니다. (만약에 물 한잔, 전기 한등, 휴지 한 칸, 전화 한통 등을 아끼는 검소를 키우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불교운동은 없었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 때가 있다고 생전에 늘 강조 하셨던 저의 아버지의 말씀이 곧 저의 기증에 있어서도 참으로 ‘기막힌 운명의 타이밍’을 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로 기증자가 많은 요즈음에 그 정도의 질을 가지고서 기증을 했었더라면 어찌 그 때 만큼 큰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싶어서 입니다.
 

저는 문화재를 수집하고, 여러 날을 감상하고, 기증했던 순간들, 또 이를 이야기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참으로 행복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 이 순간 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지나간 행복은 돌아오지를 않고, 돌아올 행복은 기약이 없습니다.
 

이 순간의 소중함을 키워 훗날 주위 분들로부터 참 잘았다는 말씀을 듣도록 우리 모두 열심히 그리고 멋지게 삽시다. 여기에 보살이 있고 포교가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별스럽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마치 별것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아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공덕을 지으려 노력하고 실천 하면서 회향하는 삶속에서 불성의 영혼이 담겨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지은 공은 표가 나고, 그 공덕만이 아미타불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또한 확신을 얻어 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8월 26일 삼보법회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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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전명철님의 댓글

전명철 작성일

선배님 !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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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호님의 댓글

김연호 작성일

존경하는 전명철 법우님! 중추가절을 맞아 가내 더욱더욱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소인의 지루한 글 보아주어 감사합니다. 관심은 곧 사랑이고 용기를 주는 것 아니겠소.
우리 행운의 만남인 대불련을 통하여 회향합시다.
훌륭하신 윤제철회장님과 명호근 보살님이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입니까 .
잘모시고서 멋진 대불련인 됩시더. 나무대원본존지장보살마하살.

조득환님의 댓글

조득환 작성일

선배님!

귀의 삼보하옵고,
평소의 활기찬 기운이 여기에 있었군요.
대불련의 상구보리하화중생의 대불련 창립이념과 3대강령을 실천하시는
보살행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나무 불 법 승

이성균님의 댓글

이성균 작성일

추석연휴에 벌써 며칠이 훌쩍 지나갔네요,,
항상 생활불교와 몸소 행동하고 실천의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대불련동문회의 자랑이시고 살아있는 표상이신 연호형님을 접하고 생각 할 때면, 늘~~ 많은 동문님들은 물론 우리 불자가 아닌 모든 사람들까지도, 실제 삶으로 보여주지고 실천하시는 선배님보면서, 보고, 듣고,, 흉내라도 따라서 내면서, 또 낼려고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형님!!,  항상, 존경합니다!!

강손주님의 댓글

강손주 작성일

선배님 할 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대불련에서의 활동은 외롭지 않아서 참 좋습니다
힘들다 싶어 돌아보면 보살행을 실천하시는 선배님들이 계시고
언제나 감동을 주는 분들이 많아
행복합니다.
잠시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박호석 선배님의 법당 불사에 동참을 한 참 고민중이 었습니다.
결혼 후 경제상황이 최악이라
못 본 척 눈 감으려 했습니다.
반성합니다.
선배님 말씀대로 이 시기가 지나면 다시 오지 않은 기회입니다.
언제나 감동을 주시는 선배님!
1000:100:10:1 법칙 아시나요?
1000명이 들으면 100명이 이해하고 10명이 공감하고 1명이 실천 한다고 합니다.
실천이 곧 기도입니다.
감사의 합장을 올립니다.

김연호님의 댓글

김연호 작성일

진심으로 존경하는 진리의 벗, 빛, 얼의 동지이신 조득환, 이성균, 강손주 법우님이시여!
소인의 객기를 한번도 마다하지 않고 칭송을 넘어 수희 찬탄해 주는 그 고운 마음에 늘 행운과 복덕이 가득하길 빌고 또 빕니다.
우리는 법우라는 그 마음 하나로 행복하고 행복한 만큼 우리의 승가에 빛이 되어 주고 있다는 사실에 미소가 머금어 집니다.
지금 우리 대불련 동문의 이자리, 지금 할일이 많고 그 만큼 아름다운 순간순간을 맞고 있다는 그 삶의 자리에서 크나큰 대폭소로 고함을 칩시다. 대불련의 우정과 그 힘의 발산이 영원하길!

원유자님의 댓글

원유자 작성일

그대있음에 불교의 맥이 청정하지요. 그대는 대불련의 산 증거요, 인재요, 롤모델입니다. 김연호보살 만세

김연호님의 댓글

김연호 작성일

원 교장선생님! 감사합니다.
1972년 8월 무주구천동 제1회 화랑대회시 캠파이어 축제때 직접사회를 보면서 진행한 패션쇼장면이 저의 망막에 그대로 남아, 원교장 선생님의 말솜씨와 귀티를 다시 상상하게 됩니다.
저와의 쭉 이어진 지중한 인연에 감사감사 할 뿐입니다. 일전 저의 서각전에서 고액의 값을 치루고 소장해주신 마음 또한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제는 충주 교통대 송연호 박물관장님의 지극한 초대로 13일간의 "목청 김연호 서각전"을 열어 주었습니다. 자리를 함께한 장총장님을 비롯한 보직교수님들이 모두 충실한 불자분들이시라 저는 참 주변이 걸고 복도 있다 싶었습니다. 또한 새로 문을 연 영월의 인도미술박물관장님 내외분(남편은 경상대법대교수)이 찾아와서 맞있는 저녁도 사시면서 "우리는 선우 제천지회"회원으로 가입해주셔 기분 좋았습니다.
 잠자리에 들기전 컴퓨터를 열어보니, 원 법우의 과분한 그러면서도 난향같은 간렬하고 향기나는 댓글이 올라 하루의 기쁨이 배가하였습니다.
 역시 찬탄해줌은 그 자체가 복이 된다 싶었습니다. 법우님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충만하길.
 나무대행보현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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