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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교수님을 추모하며....“불교가 바위라면 세속의 학문은 계란" (2007년 기사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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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경희 작성일2014.07.02 조회3,6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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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서울대 명예교수


“불교가 바위라면 세속의 학문은 계란


지난 4일 성북동 길상사에서 만난 김종서(84. 법명 원성) 서울대 명예교수는 여든넷이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했다. 30년을 한결같이 〈금강경〉을 독송하고, 지난 9년간 거르지 않고 시민선방에서 참선을 해온 김 교수는 “부처님 가르침을 생활에서 실천한 덕”이라며 웃었다.
“불교를 생활화 할때 비로소 불자가 된다”고 강조하는 김종서 명예교수는 매일 길상사 시민선방에서 ‘마음공부’를 한다.
김 교수의 수행여정은 한국불교사와 궤를 같이 한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광복을 맞은 1945년이다. “해방이 됐다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세물결에 동참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고 한다. “나라는 독립했는데 내 마음은 아직 제대로 서지 못했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스님을 찾아가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같은 해 9월1일, 트럭을 얻어 타고 평창 진부까지 간 뒤 걸어서 상원사를 올라갔다. 어렵게 찾아간 터라 반겨줄 것이란 예상과 달리 한암스님은 호통을 쳤다. ‘독립을 한다고 산 속에 있던 사람도 도시로 나가는 판국에 젊은 사람이 왜 사찰에 왔냐’는 이유에서였다. “스님의 말을 듣고 느낀바가 있어 그 길로 눌러 앉았다”는 김 교수는 한암스님으로부터 ‘원성’이란 법명을 받았다. 그리고 한암스님의 제자인 탄허스님도 만났다. “신학은 접해봤지만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 학생의 질문공세에 탄허스님은 귀찮은 내색 없이 가르쳐줬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었다. 물어본다고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아니란 걸 알았다.” 그 때부터 참선을 시작했다. 상원사 동종을 치는 소임을 맡아 새벽마다 천지의 중생을 깨우는 일을 했다. 무조건 고행을 하면 되는 줄 알고, 새벽에 찬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나라가 독립했으니, 내 마음도 바로 세워보자’
강원도로 떠난 구도길서 한암스님 만나 정진
한달 뒤 그는 다시 세속으로 돌아왔다. “허전한 마음이 하루아침에 채워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서울대 사범대의 전신인 경성 사범대를 졸업한 후 그는 교육학 공부를 계속했다. 바쁘게 지내다보니 15~16년간은 불교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할 때 탄허스님과 다시 만나면서 불교에 눈을 돌렸다. 서울대에 근무할 때는 서울대 총불교학생회 지도교수만 8년을 맡았다. 말이 지도교수지 사실 지도받는 교수였다. 학생들 신심이 워낙 두터워 하자는 대로 따르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 사이 현재 중앙승가대 총장인 종범스님과 9년 7개월 동안 〈화엄경〉 80책을 공부하기도 했다.

98년 공직 떠나 금강경 독송하며 참선정진
“바른 살림살이로 모범 보이는 것이 바로 포교”

1998년 3월, 김 교수는 일체의 외부활동을 접고 길상사 시민선방으로 들어왔다.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법정스님이 길상사 사찰을 개원하는데 자문위원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거절했는데, 만년에 불교를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에 수락했다.” ‘나쁘지 않을 것’이란 기대를 뛰어넘어 이후 길상사에서의 수행은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8년하고 10개월간 그의 일과는 〈금강경〉 독송과 참선으로 꾸려졌다. 그는 매일 오전7시 국립묘지 산책하며, 금강경을 독송한다. 산책이 끝나면 선방으로 간다.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선방으로 출근했다. 10여명의 도반들과 함께 오후정진까지 마치고 돌아오는데, 선방을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계속되는 금강경 독송은 잠자리까지 이어진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시간은 불자로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며, 불교로 하루를 시작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불교를 생활화할 때만 비로소 불자가 되는 것”임을 강조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천수경〉에서 말하는 십악참회를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영향 때문일까. 불교에 귀의하라고 강요한 바 없지만, 그의 모습을 본 자녀는 물론 손자손녀들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 어린 손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찰수련회에 참가하고, 치과의사로 일하면서 불교를 공부하다 불교학과 교수로 전직한 그 둘째 아들 동국대 김성철 교수의 특이한 이력은 아버지의 영향인 듯하다. 김 교수는 “불자라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높은 도덕기준을 갖고 그에 맞게 생활해야 한다. 불교는 말로 포교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니다.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것이고, 바른 살림살이로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피력했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선배이자 수행도반이기도 한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불교가 바위면, 세속의 학문은 계란이다.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사이지만 둘만의 공통점이 있다. 학문을 하는 과정에서 강하게 밀어붙이는 힘이 필요하듯 불교를 공부하는데도 마찬가지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치열하게 정진하다보면 불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서 교수는...
길상사 자문위원 맡아 꾸준한 신행활동
1924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194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미국 조지피바디의대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 1975년 서울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이화여대에서 부교수를 지냈으며, 1967년부터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재직했다.
국가교육개혁위원장 역임
중앙신도회.재가연대 고문
또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같은 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현재 조계종 중앙신도회 및 참여불교재가연대, 우리는 선우, 불교여성개발원 등 재가단체에서 고문이며, 길상사 자문위원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불교신문] 2007-01-06 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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