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봉 유엽 선사의 청주 대한불교수도원 불교학생회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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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태형 작성일2014.07.09 조회4,256회 댓글1건본문
1960년대 대한불교신문(현재의 불교신문) 초창기에 활동하신 화봉 유엽 스님이 대한불교수도원 지도법사로 설법을 하셨음.
*청주 삼일공원 옆에 대한불교수도원에 세원진 수도원창건비를 화봉 유엽스님께서 기록 하셨습니다.
화봉 선사는 신계사의 석두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석두 하 삼봉(효봉, 화봉, 금봉 선사)'이라 불릴 정도로 법력이 높은 스님이셨다. 양주동 박사는 화봉 선사를 일컬어 '색계를 거닐며 공을 외치던 당대의 걸승'이라고 말씀 하셨다.
불교신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교단을 외호하며, 시대정신을 선도하기 위해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청담 대종사를 초대 발행인으로 하고 주필에 이종익 씨, 편집국장에 안낙준 씨로 하여 1960년 1월 1일 ‘대한불교’라는 제호로 창간됐다.
그후 1964년 7월1일자 대한불교(現 불교신문)부터는 덕산(德山) 이한상(李漢相, 1917~1984) 거사가 불교신문사를 인수하고 두달만에 새로 나온 신문이다. 2개월은 그가 신문사 체제를 정립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덕산거사는 불교신문을 인수하고 사무실부터 옮겨 편집과 업무의 진용을 새로 짰다.
새 사무실은 종로 관훈동 계성빌딩 2층. 1972년까지 만 8년간 불교신문을 운영한 그는 이후 조계사 맞은편 공평빌딩 자리에 있던 한국철강빌딩, 명동의 풍전산업빌딩 등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신문사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어 냈다.
<서울신문> 주필을 역임한 언론인 겸 시인 유엽 주필을 중심으로 편집국장에 박경훈, 업무국장에 최인오를 영입하고 송재운, 윤영흠, 목정배 등 당시 내로라하는 기자를 등용했다. 불교전반에 걸친 풍부한 지식, 종단을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안목, 그리고 언론매체에 대한 탁월한 감각으로 신문을 신문답게 만들도록 기획하고 편집했다. 유려한 문장으로 명칼럼 명논설도 자주 썼다.
<서울신문> 주필을 역임한 언론인 겸 시인 유엽 주필을 중심으로 편집국장에 박경훈, 업무국장에 최인오를 영입하고 송재운, 윤영흠, 목정배 등 당시 내로라하는 기자를 등용했다. 불교전반에 걸친 풍부한 지식, 종단을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안목, 그리고 언론매체에 대한 탁월한 감각으로 신문을 신문답게 만들도록 기획하고 편집했다. 유려한 문장으로 명칼럼 명논설도 자주 썼다.
댓글목록
권순관님의 댓글
권순관 작성일43~44년 전에 대불련 하계 수련대회가 송광사에서 있었는데 그때 대전 심광사에 주석하고 계신다고 하시며 송광사에 오셔서 법문을 하셨는데 하도 큰 감동을 주는 법문이라 지금 까지도 귀에 생생 합니다. 돈오돈수, 돈오점수, 말후구(末後句)등 선문(禪門)의 핵심을 현대인이 알기쉽게 설명하여 주시고 멋 을 풀이 하여 주셔서 그분의 저서 " 멋으로 가는길' 을 어렵게 구하여 몆번 읽고 또 읽은적이 있습니다. 그후 원효사상과 다도(茶道)를 가르켜 주시던 효당 최범술님께서 유엽 화봉스님의 인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며 일본에 같이 유학을 가시게 되었는데 일본에 갈때만 해도 일어를 한마디도 못했는데 막상 일본에 가서는 일본어를 3개월만에 완전히 구사하며 일본 미인을 꼬셔, 같이 동거를 하드라고 일화를 소개한적 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