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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평론>여름호: 벌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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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호석 작성일2014.06.12 조회4,2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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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과 성찰] 벌새 이야기 / 박호석
newsdaybox_top.gif[58호] 2014년 06월 01일 (일) 박호석 btn_sendmail.gif농학박사, 전 농협대 교수newsdaybox_dn.gif
벌새, 크기가 작고 벌처럼 윙윙대며 날며, 꽃의 꿀을 먹고 산다고 그렇게 부른다. 일반적으로 화려한 깃털과 긴 부리를 가진 벌새는 꿀벌만 한 작은 종(種)에서 큰 것은 참새 크기까지 약 3백여 종이 지구 상에 서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벌새는 마치 헬리콥터처럼 제자리에서 날면서 꽃의 꿀을 먹기 때문에 1초에 많게는 80번이나 날갯짓을 하고, 고속도로의 자동차만큼이나 빨리 난다. 특히 가속(加速)과 선회(旋回)를 자유자재로 하는 그의 비행술은 신비에 가까워서 다른 새들이 흉내 내지 못한다. 그래서 벌새는 새들 가운데 가장 튼튼한 가슴근육과 가장 높은 에너지대사율을 가졌고, 또 가장 많은 잠을 잔다고 한다.
벌새는 어떻게 이런 초능력(?)을 가진 것일까?
먼저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다.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분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명백히 보여 알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다.”(《로마서》 1장 20절). “하지만 짐승에게 물어보게나. 너희에게 가르쳐줄 것이네. 공중의 새들에게 물어보게나. 너희에게 말해 줄 테니. 아니면 땅에게 말해 보게나. 너희에게 가르쳐 줄 테니. 그도 아니면 바다의 고기들이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이네. 여호와의 손이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을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모르겠는가?”(《욥기》 12장 7-9절).
말씀인즉, 눈에 보이는 않는 여호와의 능력이 그가 창조한 만물을 통해 증명되고 있으니 딴소리하지 말고, 궁금하면 짐승·새·땅·물고기에게나 물어보라는 말씀이다. 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성의한가?
그래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게 되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게 되고,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이 소멸한다.”(잡아함경)
희귀한 생물이 많기로 유명한 인도양의 마다가스카르에는 세상에서 가장 긴 부리를 가진 벌새가 있다. 이 종은 꽃자루가 긴 나팔꽃의 꿀을 먹고 살기 때문에 부리가 길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팔꽃도 자신의 번식을 위해 제 나름대로 벌새에게 꽃가루를 더 묻게 하려고 꽃자루를 늘렸다고 한다. 그러니 꽃은 꽃자루를, 새는 부리를 점점 늘려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창조론자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를 증명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설계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벌새의 엄청난 날갯짓이나, 긴 잠, 에너지대사율, 현란한 색깔의 깃, 그리고 신기에 가까운 비행술들도 모두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들 스스로 그렇게 진화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도 긴부리벌새와 나팔꽃처럼, 이것에 의해서 저것이, 저것에 의해 이것이 있게 된 이유임이 자명하다. 그러니 거기에는 누구의 의도나 손길이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러한 현상은 잔디밭을 가꾸면서도 종종 경험하곤 한다. 집 마당에 잔디를 심었더니 넓지 않은 면적이지만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내내 김과 씨름을 한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콩밭에서 자라는 바랭이는 사람보다 높이 자라는데, 잔디밭에서는 마치 잔디 행세를 한다. 바랭이뿐만 아니고 씀바귀도 잔디를 닮는다. 그리고 민들레나 괭이풀과 같이 처음부터 잔디를 흉내 낼 수 없는 종들은 색깔로 위장하거나 성장 시기를 조절하여 호미를 들고 자신을 수색하는 주인의 시선을 따돌린다.
이처럼 종은 같은데 자라는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같은 바랭이가 잔디밭에서는 서로 다른 종처럼 자라는 현상, 즉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기(生起)하고 생멸(生滅)하는 현상−을 자연(自然)이란 말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더욱더 놀라운 것은 매지 않고 내버려두면 바랭이나 씀바귀도 원래의 모습대로 자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럼 나는, 사람은?’ 하고 반문해 본다.
나를 구성하는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의 색(色)은 어떤 인연으로 이 몸에 있을까? 내 몸의 물은 설산(雪山)의 눈이었을까, 북국의 빙하였을까? 아침 이슬이었을까, 저녁 빗방울이었을까? 지난여름 태풍으로 왔을까, 겨울 폭설로 왔을까? 물도 이럴진대, 공기며 음식이며 생명은? 또, 내 이 모습은?
중중무진(重重無盡), 천지동근(天地同根), 공업중생(共業衆生)이란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다. 그러니 나를 여기에 있게 해 준 일체 존재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이 고맙고, 볼 수 있는 눈이 있어 감사하다. 먹을 수 있어 고맙고, 살고 살려짐에 감사하다. 움직일 수 있어 고맙고, 생각할 수 있어 감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진리를 일러주신 부처님이 고맙고, 또 감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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