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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 하나로 피워낸 그윽한 꽃 한 송이, 상현 보살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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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연호 작성일2013.07.24 조회5,989회 댓글15건

본문

1976년 경남지부 출신들이 학생시절 법회 사찰이었던 연화사를 찾다.
<우측 앞줄부터 강희남, 김희자, 김상현, 뒷줄 김연호, 옥성호, 조정숙, 백효흠, 김석현, 문창현>


의지 하나로 피워낸 그윽한 꽃 한 송이,
상현 보살이시여!

  지금부터 꼭 43년 전인 서력 1970년 겨울, 다솔사를 찾았을 때 김상현이란 천재가 있다며 공양주 보살은 토굴 같은 그의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자 마치 굴속의 호랑이가 두 눈에서 형광 하는 강한 모습처럼 상현 형은 엉겁결에 저를 맞았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반백년이 가까워 오는 짧지 않은 시공 속에서 서로 간엔 한때도 적조함이 없게 지냈습니다. 형과 저는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습니다. 형은 등치는 저와 좀 차이가 나지만 의지와 행동 직관력, 글과 말솜씨, 보시정신 등등은 소인 보다 훌쩍 뛰어 넘는 대인으로 군림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형을 존경하면서 형의 알뜰한 살림살이, 사물을 보는 안목, 깔끔한 정신생활, 지적탐구력, 진보정신을 흠모하며 지금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용열한 저는 형을 깊이 존경할 뿐 흉내라도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학생시절 자취방에 잘 정돈된 이부자리와 책, 부엌살림 살이 등은 하나 같이 빛을 토하고 있음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학생시절부터 화랑정신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하여 백효흠 형과 함께 경주는 물론 강원도 까지 화랑과 연관 이름 있는 촌락과 비문 자료를 하나하나 제주 다 찾아서 사진을 찍고 탁본을 치며 헤매던 열정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 싹수는 드디어 그 지난한 대학강단의 길을 열고서 신라화엄연구, 신 삼국유사 연구, 화랑연구, 한국의 다도정신, 원효의 연구로 새로운 안목을 일구며 학문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서울대 신용하 교수가 독립선언서의 마지막 공양 삼장을 만해가 쓴 것이 아니라 최남선이 쓴 것이라고 매스컴을 도배하자, 이에 대한 반박을 자기전공분야도 아닌 데도 불구하고 자료와 증언을 충실하게 정리하여 논문으로 말하여 자칫 위기에 처한 독립선언서의 사실을 구해 냈으며,
 
  은사이신 효당 최범술 스님이 친일을 했다는 황당한 논리로서 그대로 친일명단에 오르기 직전에 다시 효당의 일정에 대한 투쟁적 삶의 전후를 정리하여 보기 좋게 뒤 엎어 버린 적도 있으며, 또한 법장의 저서로 오인된 '화엄경문답'을 의상의 저서 '추동기'로 다시 증명함으로써 어둠 속에 숨어버린 의상 사상의 전모를 밝혀낸 것은 모두 동아시아 불교사를 새롭게 쓴 진정 빛나는 한국불교사의 불멸의 한 획입니다.
 
 정말 김상현 형의 부지런함과 지적탐구력 의지력으로 일구어낸 펜의 힘은 한국불교사에 기념비적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의 천재적인 러시아인 한국역사학자 박노자 교수는 날카롭기 짝이 없는 글들에서 형을 언급하며 칭송했고, 독일의 한국 고대 불교학 교수 프라센 교수는 고대 한국 불교 분야에 있어서 근현대 독보적인 석학으로 형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학문적인 성과가 있었다 하더라도 일상 가정생활이 흐지부지하고 온당치 못한 구석이 있었다면 어찌 가시는 길이 그렇게 많은 애도의 물결로 일렁거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무엇보다 지금부터 15년 전에 닥친 사모님의 뇌졸증이란 최악의 건강 상황을 자연스레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서 간병하던 중에 다시 두 번의 생사고비를 지극한 사랑의 병간호로 생명부지하게 하심은 곧 아름다운 현실적인 보살의 길이었습니다.

 한번은 유선으로 안부를 묻자 지금 집사람을 태우고서 동국대 한방병원에 갔다가 한강다리를 건너면서 여기는 어디이고 한강의 물빛은 어떠하다는 주변상황을 열심히 생중계방송을 하면서 가고 있다는 자상함, 또 한 번은 전화로 대뜸 “김원장 오늘 텔레비전에 나왔었나?” “퇴근을 해서 오니까 집사람이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스무고개를 해서 겨우 자네가 출연 했다는 데”에 접근했다는 말씀에 저는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이런 하나하나의 한결같은 참된 보살의 삶을 뒤로 하고서 우리 곁을 떠난 형의 그리운 모습이 슬픔으로 끝없이 사무칩니다.

 백두산에 올라 천지의 신령수 앞에서 삼배를 올리며 상현 형의 쾌차는 물론 주변의 모든 분들이 건강하고 행복이 가득하길 빌고서, 한없이 열린 백두산록의 자작나무 수림과 평원에 세찬 바람을 피하려 키를 낮춘 百花들의 萬香에 취하며 하산하던 길이었습니다.
 
  문득 무언가 스친 바가 있어 켜본 핸드폰 창에는 줄줄이 들어온 형의 비보를 알리며 저를 찾는 지인들의 글줄로 가득 했습니다. 이를 접하는 순간 저는 뭇 하산 객들도 개의치 않은 채, 哭 했습니다. 그리고 곧 합해진 일행과 버스 속에서 동행한 제천의 성문스님의 집전으로 상현 형의 극락왕생발원과 뜨거운 눈물속의 나무아미타불 염불 소리는 앞산은 겹겹이고 뒷산은 첩첩인 백두산을 휘돌아 사라져 갔습니다.
 
 일행 중 우리 대불련 동문부부와 아들인 박홍우 판사와 김교수, 박 변호사, 조화제 박사, 이남재 선생, 그리고 이수덕 참여불교대표, 박광서 교수, 정윤선 박사, 반야행보살 등은 고인의 명복을 지극히 빌었고 줄줄이 인연담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23일 오후 마치 알면서도 피해간 비굴인 양 저의 귀국 길은 영 개운치를 않았습니다.  인천공항에 발을 내려놓는 순간 형과의 지난 43년간의 영상의 필름이 돌기 시작하면서 그리움을 주체 할 길이 없었습니다.
 
 상현 형님! 육십 중반이 넘도록 불기운이 뚝뚝 떨어지던 두 눈을 뭐가 그렇게 급해서 갑작스레 감으셨습니까. 아직도 거동이 많이 불편한 형수님이 걱정도 되지를 않았습니까. 또한 아직 출가하지 않은 두 아들 딸은 염려도 되지를 않았습니까.

  그리고 일심으로 근 50년의 지극한 우정의 손길을 놓지 않았던 백효흠과 만나면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로 밤을 지새던 순관 형을 비롯한 신우섭 형, 김점국 형, 오태룡형, 구자옥, 조정숙, 이순덕, 김연호 등등은 그 얼마나 허전함을 줄줄이 삼키라고 그냥 무심히 가버리셨습니까. 그리고 미쳐 정리를 끝내지 않은 대발견의 논문들은 누구더러 정리하라고 책임도 없이 가셨습니까.
 
 아무리 인생은 그리움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리움은 허무만 잔뜩 안기고서 이를 다시 일깨우게 하는 현실이네요.

 바라옵건대 이젠 고향과 영면지인 가야산록을 떠나 생시의 그 크나큰 삶의 업적으로 백두산록에 환생하셔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백만 조선족의 가슴에 가득 자비를 심어주시는 제2의 水月스님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김연호 분향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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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구미혜님의 댓글

구미혜 작성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제천에 사시는 김연호선배님께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김상현선배님이 돌아가셨다고 그순간 다리와 팔이 후들거리며
눈물이 나도모르게 흘러내렸다.
고2때 키가 작으만한 상현선배님과의 있었던 추억이 아련이 생각난다.
우리 진주 연화불교학생회시절 회비기금마련을 위해 추운 겨울에 찹쌀떡장사를
하게 되었었다.
길거리에서 찹쌀떡장사를 하고 있는데 연호오빠를 만나게 되었다.
연호오빠는 떡을 팔아줄려고 우리를 김상현선배님 자취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방에는 7~8명의 대불연 회원이 모여있었다.
상현선배님이 눈을 날카롭게 우리를 쳐다보면서 떡을 내려놓고 우리보고 떡을 먹으라고 했다.
우리는 철없이 떡을 먹고있는데 상현선배님은 떡을 드시지도 않고 한마디 하셨다.
한참공부할 나이에 떡을 팔러 다니냐고?
다른종교는 돈을 주면서 하는데 . . . 우리는 무슨꼴인고.
울먹이면서 이떡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느냐, 그러면서 들었던떡을 방바닥에 내리쳐
떡안고가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돈과 떡을 모두 가지고 나가라고 했다.
그때 선배님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제가 공직에서 퇴임하게 되면 꼭 찾아뵙고 싶었던 분이셨다.
만나면 찹쌀떡 이야기며 옛날 진주 연화사 시절 있었던 추억들로 밤을 지새우면서 
회포를 풀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우리곁을 떠나셨나요?
극락왕생하옵소서!

김현숙님의 댓글

김현숙 댓글의 댓글 작성일

* 가까이서 함께 나눈 인연이 있었는지도 기억에 없어, 어쩌면 한 번도 뵌 적도 없을 수도 있는....  . 그간 불교공부를 열심히 하고, 동문님들과의 교류가 더 많았다면 직접 찾아가 뵐 수도 있었을 훌륭한 스승님 같은 선배님을. ~ 일요일(21일) 낮, 동문회사무실에서 소식 접하고서도 박한 인생살이에 얶매여 장례식장에도 함께 못한 서러움이 있군요.

 *올 봄부터 무슨 인과에 답하는 선물이 있었는지 동국대를 왔다갔다 하면서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아~~~! 진작 김상현선배님과 마주한 인연이 있었다면, 한 번 찾아가 차라도 한 잔 나누고, 후배라고 맛있는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했더라면, 조금은 더 교수님을 우리 곁에 계시게 할 수 있었을까!

*올해, 봄과 초여름 내내 오갔던, 만해관, 혜화관, 동국관(사회과학관), 도서관 등 3월부터 7월 초까지는 정각원, 중강당을 포함해 심지어 사명대사동상이 있는 장충당공원 끝자락의 벤취에 앉아 보낸 시간도 적지 않는데, 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주로 머문 곳도 바로 고 김상현교수님이 학생을 지도했던 사회과학관 건물이었다는 점이다. ~~~~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법정스님을 존경하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법정스님의 젊은 시절, 불교 관련 경전에 대한 번역 등 일반적으로 시중에 알려진 아름다운 글 이외에도 수행하는 분답게 치열한 결과물을 젊은날의 흔적으로 남기셨다. 일반 재가불자가 덕높으신 스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 분의 생애가 하루가 수행의 땀방울로 우리 미진한 중생에 대한 자비심으로 일관함이었다면, 그 어찌 그 덕을 더불어 칭송하지 않을 수 있을까.

*故김상현교수님이시자 선배님, 정말 이렇게 훌륭하심을 미리 접하지 못함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내 눈의 답답함과 내 귀의 두터움으로 곁에 이렇게 향기롭고 맑은 앞선 선배님이 계신 줄을 몰랐음을 참회 아니할 수 없습니다. 교수님의 진한 향기, 저희들, 아둔하고 어리지만, 어찌 저희들 옷자락에 스며들지 않겠습니까.

* 개인적으로 오빠가 올해 봄, 본인의 환갑해를 맞이하고도 -참으로 병과의 질긴 악연을 이기지 못해 올해 봄. 어머니 1주기 사흘째 날, 영면하셨다.

* 가신 자의 인생이 더 허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남은 자의 성의로운 인생살이가 숙제라고 생각한다. 내 피붙이에 대한 숙제도 풀어야 하지만, 훌륭하신 고 김상현교수님에 대한 뒤에 남은 후배들의 태도는~ 더 열심히 불교도로 정진 수행하고 자비심을 실천하는 불교인으로의 삶만이 못다한 선배님 생에 대한 후배로서 갖추어야 태도라 짐작이 된다.

*우선 자세를 가다듬고 불교에 대한 공부도 한 걸음, 한 걸음 더 숙성시키지 않음을 안될 것이다. 법정 스님! 1979년이었다. 그해 여름 내가 속했던 부산지부는 송광사로 수련대회를 가, 2일째 불임암에 계셨던 법정스님이 낮시간 강의가 있었다. 햇수로 34년 前의 일인데,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강의 내용이 생야전기현, 사야전기현("생야전기현(生也全機現) 사야전기현(死也全機現)"이셨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죽어야 한다.

-故, 김상현 선배님께서는 더 이상 생야전기현 사야전기현이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 아닌가 감히 사료해 보면서,  늦었지만 삼가 조의를 표하며, 극락왕생을 기원드리며, 중생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슬픔의 감정으로 접해지는 죽음 앞에서 어머님과 오빠도 함께 좋은 곳에 계시길 이 시간을 빌어 기원 올립니다.

-세상 모든 것, 감사하고 부처님 은혜, 아니 미치시는 곳 없으시며, 살아있는 것, 모두 행복하시길, 며칠간 타국에서 헤매다 돌아와 아침에 부족한 낱말 몇 자, 어지롭게 늘어 놓았습니다.  법연각 합장

김연호님의 댓글

김연호 작성일

소인의 난삽한 못난 글을 밉다하지 않으시고 다읽어시고서, 김상현 보살에대한 애뜻한 감성의 글을 올려주신 김현숙 누이법우에게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공식 행사에서 마주치신 적이 있으련만 이미지가 잡히지를 않아 안타깝습니다. 주소를 알면 별 영양가는 없는 잡문집이지만 졸저 한권을 보내드리고싶습니다.

 구미혜 과장 1973년 12월의 어느날 밤의 해프닝을 기억해냈군요. 저번 5월 다솔사 차회를 마치고서 남해 순관형 별장에 다시 모인 우리동문(김상현,권순관, 백효흠내외, 구자옥, 조정숙, 이순덕, 김연호)의 자리에서도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놓고 다들 배꼽을 지고서 웃었소. 당시 상현형도 배가 고팠을 텐데도 불구하고서, 이떡이 내목구멍에 넘어 가겠느냐며 마치 냑아 챈 파리를 방바닥에 패대기 치듯하자 떡을 먹고있던 진고와 진여고생들 일순 놀라 입에 반들어갔던것을 손수건에 퍁어내고 반은 목에 넘기고서 어쩔줄을 몰라했고 한여학생은 눈물을 흘리며 뛰어 나갔던 당시의 되돌려본 필름은 어쩌면 눈물젖는 희극이었소. 그렇게 순간적 판단과 감각이 돋보였던 상현형이 자꾸만 그립소. 아-

김현숙님의 댓글

김현숙 댓글의 댓글 작성일

*수석부회장님의 글은 지극히 절제와 부분적으로는 감정 표현이 어느 수준의 경지는 넘어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5학년을 넘어 6학년을 향하면 적게 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파악하는 시선으론 특별히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도 없고(물론,고 김상현님은 대단하십니다) 낮은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 끝에 동문 중의 한 분이 이번에 동문회 일을 하라고 권하셨어-인연이라 생각해 좀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흐름에 안내해주신 김상현교수님의 훌륭함을 접하고 저도 모르게 감히 댓글을 썼고,  선배인 분이 이렇게 훌륭하였는데, 새파랗게 어렸던 우리는 '청출어람'이란 말도 있건만-유치한 세월만 보내고 살아왔구나 하는 회한, 등 등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황동규 시인의 시구처럼-동문회에 대한 저의 사랑도 어느날 반드시 그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행무상인데,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흐름으로 하는 말입니다...... 현재로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수석부회장님이 쓰신 책, 기회가 되면 받아보고 싶군요.

----------------------------------------- //  동문회 단체의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이 힘든 형편에 한 가지 --- 이번 8월 17~18일 행사 관련 선배님들이 앞장 서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행사관련 기부금 협조가 꼭 필요합니다. 선배님께서 많은 기부를 하셔야 된다는 것이 아니옵니다. 주변에 권선을 널리 널리 해주셨어(상중인데 다시 한 번 죄송한 말씀을 올립니다) 고 김상현교수님이 원하는 바람직한 대불련-총동문회를 위해, 있는 정성을 다해, 혹은 십시일반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게 해드려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그럼, 이만. (). 생명있는 것 다 행복하시길~~!

김연호님의 댓글

김연호 작성일

김현숙법우님! 주소를 좀주이소. 010-9588-7100으로 찍어 주소.

부산이성균님의 댓글

부산이성균 작성일

선배님께서 가신 날, 당일 아침에 경남지부 동문 김옥란후배한테 전화가 와서 선배님께서 가셨다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황당하고 기가 찬 일이라서, 대뜸 연호형은? 하고 물으니까, 연호선배님은 우리는 선우팀과 지금 중국 백두산 순례를 가셨다면서, 자녀 둘이 아직 아무도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말까지 들으니, 그간 형수님께서도 오래전부터 건강이 불편하셨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바, 자녀 둘, 아직 결혼도 안한 형편을 들으니 이 또한 참으로 기가 찬 소식이었다.
며칠 후 연호형께서 본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리시고 난 이후에, 지금쯤은 형님도 숨을 좀 돌리시겠다 생각되어서 퇴근하면서 형님께 전화해서 대뜸, 마땅히 선배님 조문을 가야했는데 못가서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부터 드렸다.
 
김상현선배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이전부터 연호형님께서 김상현선배님이 대단하시다는 말씀은 늘 상 듣곤 했는데, 사실 이번에 일편이라도 전해듣고 보니 참으로 대단하신 선배님이시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2004년 6월 대불련동문 17대 국회의원당선 축하연을 한국일보사 빌딩에서 할 때, 같은 테이블에서 옆에 나란히 앉아서 당시 사회를 보시던 백효흠선배님을 가리키면서 저 선배님, 경남 고성출신이 아닙니까? 하면서 고성사람이 원래 좀 똑똑합니다며 같이 웃었던 기억과.(나도 고성 사람이라고하면서),
2004년 8월 김천 직지사 제2회 대불련총동문대회에 연사로 오셨을 때(목정배교수님과), 그리고 다음해 2005년 천태종 구인사에서 야간 야회 행사 후, 막걸리집 평상에서, 당시 인각사에서 진행했던 주지 상인스님과, 일연스님 삼국유사 축제행사 등으로 잠시 담소를 나눴던, 그리고 지난 3~4년 전쯤에, 부산 코모도호텔에서 “부산 화쟁포럼”(이사장: 전, 신라대학교 김용태총장 / 법산스님) 행사에 “원효스님의 화쟁 사상”이란 주제로 초청 연사로 오신다는 신문, 매스컴을 보고, 당일 행사보다는 오로지 선배님을 만나러 가서, 행사 시작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초청연사인 선배님 모습이 안 보이시기에 선배님께 휴대폰으로 전화하니 호텔 객실에 계신다고해서(잠시 쉬라고 마련해주셨다는 객실에) 올라가서 인사하고 같이 행사장에와서 강연, 행사이후, 참석자들과 사진촬영도 많이하시고, 서울에 가실 때는 부산역까지 모셔드리면서 다음에 혹, 부산에 내려오시면 후배가 모시겠으니 후배한테 연락주시라고, 후배 두었다가 어디에 쓸 거냐고 하면서, 헤어진 이후 그날로 선배님과는 마지막으로 뵌 것 같다.

김상현 선배님!!, 부디 영면하시고, 극락왕생하셔서, 내생에는 아프지도 슬프지도 힘들지도 않는 삶이 되시길 빕니다.

2013년 7월27일 (토)  대불련동문후배  부경대75학번  이성균 합장 재배.

김윤권님의 댓글

김윤권 작성일

김상현교수의 영민을 애도합니다.김연호원장이 쓴 추모의글 보면서 김교수의 불교에대한 이해와열정이 남달랐다는 것을 세삼느끼게 됨니다.
우리집 할매가 중앙발물관연구반에 15년간 다니면서 김교수의 한국미술사강의가 그렇게도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칭찬할때는 항상 내마음이
부뜻했는데 너무나 안타갑읍니다.진주청곡사에3년간 부모님이 거처하면서 기도로 이세상에 태어난  본인으로서는 부처님의 사랑이 빼속깊이
베어있는 모태신앙의 본보기 이지만 아직도 부처님의 사랑을 이 미혹한 세상에 온몸바처 실천하지 못하고있는 자신을항상 자괴합니다.
내고향진주 1945년 일본서 귀국하여 늦깍이로 국민학교졸업하고 1953년 휴전후 바로 서울로 왔으니 딱 60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진주에서 젊은 불교를 시작한 .오태룡.김상현,김연호 백효흠,권순관등 모든 후배들에게 아무도움도 되지못해 부꺼럽게 생각하며,그대들의
변함없는 열정과신뢰에 박수를 보냄니다..이제 우리들의 젊음날의 표상 대불련이 5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에 우리모두의 자화상을 음미하게합니다.
오늘 아버님별세 48주년을맞아 진주,청곡사,고향등 지나간세월의 상념이 머리속을 스치기에 이글을 씀니다.

김연호님의 댓글

김연호 작성일

이성균아우님!또 소인의 글을 외면치 않고서 글을 주셔 늘고만고 뿌듯합니다.
우쩌겠소! 이왕 맺은 인연으로 우리 동문회에 애정 놓지 맙시다.
 
 김윤근 큰형님! 형님의 존안을 적극적으로 뵌지도 35년이나 되었습니다.
 내내지켜본 큰형님의 모습과 신심은 한치도 변함이 없으셔 귀감이 됩니다.
 다아시는 사실이지만 김상현이란 인물 참 대인이었습니다.
 어쩌면 잡초처럼 성장했었지만 백두산 자작나무처럼 모진바람과 설한을 꿋꿋하게 이겨가면서 초라하게 살지않고 고귀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품잡고서 살다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지난을 아겨냈으면 한참 더인생을 구가해야지 왜 벌써 갑니까.
 이글을 쓰는 순간순간에도 추모의 마음이 밝기보다 눈앞이 침침해집니다.
 큰형님! 건강하이소. 그리고 뭐던지  항시 사오신사오신(小心小心) 살펴갑시더 .
 
 j-youma@hanmail.net(한 법우님의 하명으로 소인의 이메일을 얹어놓습니다)

권순관님의 댓글

권순관 작성일

김윤권 선배님!  항상 마음속에 존경과  그리움이  잔잔히 일고  있어면서  문안 전화 한번 하지 못하여 죄송하여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일년에 한번 대불동 전국모임이 있을때 마다, 자비로운  존안과 사랑이 넘치는
격려를 해주시는 모습을 잊지않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세년년(歲歲年年)  강건하시어  대불련의 밝은 빛으로  남아 주시길  기원 합니다.  저의 중고교 동기 하관봉군을  사업상  길러 주시고  은사 하순봉 선생님과 서울대 동기의 인연을 말씀 하실때  다시한번  지중한 인연을 느겼습니다.  현재 진주시장으로 있는 이창희군도
중고교 동창일뿐 아니라, 이시장이 청곡사에서 틀어박혀 공부하여  입법고시 합격하여 국회 수석전문위원(1급 관리관) 으로  있다가 경남도 부지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어면서 청곡사의 추억을 자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선배님께서도 청곡사와의 인연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김상현교수의 부음은 너무나 가슴아픈
소식이었습니다. 45년이상 우의를 다져 오고  있었기에  지난세월들이  영화의 한장면 처럼 계속 스치고 지나 갑니다.  5월25일 저의  우거 남해에서 같이 찍은 사진들을 전해주지도 못하였습니다.  평소 畏敬할뿐 아니라  자랑스러운 牧靑 金然鎬법우의  이글을 보고  넑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먼산과  바다만 바라볼 뿐 입니다.    다시한번 선배님의  대안을 비옵니다.  꼭 남해에 한번 왕림 하시길  고대 하겠습니다.

부산이성균님의 댓글

부산이성균 작성일

수 년전에 큰형님께서는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나오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총동문회에 진주 출신동문들이 꽤 많지요,, 대구,경북지부 조득환회장은 진주고 연화사 고불출신이고, 박현숙(덕성여대74)동문도 진주여고 연화사 고불출신이고, 저도 진주중,진주고 출신입니다.

김윤권님의 댓글

김윤권 작성일

이성균사장 잘 알고있어요,진주출신들이 대불련발전에 큰 추진세력이 되고있지요. 항상 자랑하고 있어요 .
이번 동문회분열 사태를 해소하기위 6-7월간 밥낮을 가리지 않고 앞장서 동분서주해서 띈 결과는 별로 탐탁지 않지만
서부경남 진주인의 기계가 아니겠오,대불련과 동문회창립인의 한사람으로 대불련 50주년기념행사가 대내외적으로 동문회의
분열양상을 표출하지 않고 치룰수 있도록 노력했을 뿐이오 그결과가 대불련주관 동문들후원으로  미안해요

강손주님의 댓글

강손주 작성일

김연호선배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우리들 곁에 이토록 훌륭한선배님이 지금껏 대불동문회란 이름아래 가까이 계셨다는게
다시금 자랑스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염원으로 반드시 극락왕생 하셨을 것입니다.
김상현 선배님 저는 잘 모릅니다. 백효흠선배님 따님결혼식에서 대단하신 주위지인들을 다 두고
주례를 보신분이 김상현선배님이셨습니다. 지금까지 가 본 결혼식 중 최고의 주례사 셨습니다.
장문의 축시를 주례사로 대신하셨는데 한문장도 놓칠수 없는 명언들이라  어렵게 하객들을 비집고 찾아가
축시를 좀 받을 수 없는냐고 했더니 쑥스러워 하셨어요.
그 축시를 아직 받지도 못했는데.........
법현스님 집전으로 동문들이 추모법회 중 아미타기도를 할 때 슬픈데 슬프지 않고 너무 좋았습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분명 인도하셨을 것입니다.
발인제 전 날 밤 내일 아침 3시에 일어나면 참석을 하자 억수같은 비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는데
그 비소리에 잠이 깨여 일어나니 새벽 3시 였습니다.
제 인생에 <김상현선배님 발인제>참석하게 된 것도 참으로 복받은 일이였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선배님이셨지만 백효흠선배님의 마지막보내는 말씀에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김연호선배님의 글을 대하고 보니
이 시대를 다녀간 선지식님을 보내는 자리에 함께한 저는 참으로 기도하며 잘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상현선배님을 다시 선지식으로 탄생시켜 주신 우리들의 김연호 선배님 감사드립니다.
  강손주 합장

조정숙님의 댓글

조정숙 작성일

살면서  가슴 한 쪽이 베인것 같은 통증 을 느끼지 않은 이가 없으리오마는 선배님의 비보에 무너져 내렸소이다.
많은 귀한 이들의  만남 중 에 가장 귀한 인연 오랫 동안 나누리라 여겼건만 웃는 모습만 남겨 두고 가셨소이다
생각 만으로도 목이 메어 숨이 턱 하고 멎어 버릴 만치 슬픔을 남겨두고 그렇게 떠났소이다
아픔으로 그리움으로 상처 하나 남겨 두고 가셨소이다
왕생 극락 하소서

이순덕님의 댓글

이순덕 작성일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미련이 그리고 그리움이 남기 때문이지요.
일주일간의 연수를 위한 서울행 고속버스 속에서의 비보는 선통(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었습니다.
세찬 장맛비는 유리창을 때리고 이제 큰 소리로 함께 마주 앉아 애기도 웃을 수도 없다는 10여년 전에 경험했던 슬픔이 엄습하여 두렵기도 하엿습니다. 선배님과 함께 남해 권순관 선배님의 '목우아란야'에서 백효흠부회장 내외, 김연호수석부회장, 조정숙, 구자옥법우 등과 박장대소하며 가슴펴고 웃으시던 모습이 너무나 순수하였습니다. 가족사랑에 사모님사랑에 세상의 농담한번 해 보지 못하여 몇번이고 설명해야 알아들으시던 애기 같던 순수했던 모습!
가장 최근의 만남이 5월 24일 '다솔사차축제'에서의 강연에서 고증으로 밝혀낸 새로운 사실에 우린 또 가슴 두근거렸습니다. 그 때 다솔사 차맛을 마지막으로 음미하셨습니까? 아직 함께 찍은 사진을 전해드리지도 못했는데...
선배님, 그 동안 고증과 학문연구 등으로 밝혀내어 바른 역사정립에 자랑스러운 대불출신으로, 후배를 아끼는 선배님으로 자리잡아 오셨기에 저희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친구를 잃을까봐 입원부터 날마다 병원에 사신 백효흠상임부회장, 백두산에서 수월스님 발자취를 찾다 귀국하지 못해 천지에서 통곡과 기도를 올린김연호수석부회장, 모든 동문들과 지인에게 부음을 알리며 안타까웠던 친구 권순관 사장님의 슬픔이 더욱 커 아직 마음을 추수리지 못하고 제3재일을 다솔사에서 거행한다하여 그자리에 자연스래 모여질 것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선사에서 전국대불련총회를 마치고 야간열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선배님은 대구에서 내리시고 우리는 계속달렸는데 마지막 어둠 속에서 작은 점처럼 남아 서 계셨던 선배님의 추억이 멀어져갈까 두렵습니다. 왕생극락하소서!

이자옥님의 댓글

이자옥 작성일

의지 하나로 피워낸 그윽한 꽃 한 송이,
  백두산 자락에서 접한 비보에 곡하며 내려온 연호님의 애도의 글을 보며 가슴이 미어집니다. 마지막 가는 길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회한은 또 얼마나 큰 것이었습니까.
  “이젠 고향과 가야산록을 떠나 생시의 그 크나큰 삶의 업적으로 백두산록에 환생하여 이백만 조선족의 가슴에 자비를 가득 심어주소서.”
피맺힌 기원을 드리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을 아우님 생각이 겹쳐 나의 아픔은 그만 묻히고 맙니다.

  월정사 템플스테이를 마칠 무렵 믿기지 않는 소식을 문자로 접했습니다. 몇 번이고 내 눈을 의심하며 다시 보았습니다. 부모님의 부고가 아닌가 하고. 눈비비고 다시 보아도 김상현님 본인의 작고소식이었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요. 상경하는 버스 안에서 내내 가슴이 뛰고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전철역에서 동문회 사무실에 확인을 하고, 집에 배낭을 벗어던지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미소로 하얀 화환 속에 있는 그분의 영정을 보고서야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안타까움은 더해만 갔습니다.

  그분과의 인연은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갑니다.
대불련 수련대회 심포지움에서 원효사상과 삼국유사에 나타난 불교사상, 그리고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던 화랑에 대해 열렬히 토해내던 작은 거인이 학생 신분이었다는 사실에 수련생 모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또 그 훌륭한 화랑의 뒤에는 그들을 키워낸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다는 대목에선 여대생들의 환호가 이어졌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대불련 8년차 부회장직을 맡고 있던 시절, 70년도쯤엔 부산과 진주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김상현님은 나를 이끌어 다솔사 최범술 스님께도 안내해 주었고, 진주 남강 촉석루 의암에도 서보게 했습니다. 다솔사가 어린 시절 그분의 깊은 인연처임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서 그분의 다도 강의를 들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삼국유사 강의도 듣는 남모르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동국대 교정에서 밝은 미소로 간간이 만날 수 있었던 작은 거인 김상현님, 학문적인 업적은 물론 인간적인 따스함으로 법우와 후배들의 표상이었던 그분을 이젠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떠남이 믿기지 않지만 그래도 보내드려야 한다면 떨리는 가슴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겠습니다.
원왕생, 원왕생, 극락왕생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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