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2월에-
못 다 핀 한 떨기 연꽃 : 김동현 시인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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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시인이 올해 초 70세의 생을 접었다. 김 시인은 제천문학회를 거쳐 간 가장 출중한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차곡하게 밟아 간 입지전적인 인생길로, 깊은 신심을 지닌 불교인으로, 인권 변호사라는 직업까지 얻은 그 다복함으로 그를 아는 제천의 문인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특히 나에게는 고통스러웠던 그 말년의 삶에 대한 연민으로 더욱 추모의 정을 드리우게 한다.
김 시인은 충남 태안군 안면도 출신이다. 공주사범을 졸업하고 대구에서 초등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나 동시에 영남대 법대 야간부를 다니며 더 원대한 꿈을 키웠고, 졸업 후 중등 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제천 고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김 시인은 중등 교사로 일반사회 과목을 가르쳤으나 퇴근 후 사법고시 준비로 큰 두 눈은 늘 충혈 되어 있었다. 더불어 천부적인 재능과 친구이자 처남인 중견시인 나태주의 영향으로 詩心을 키워 나갔고 드디어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물론이거니와 그 당시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는 5천여 명 정도가 응모할 정도로 치열했고 등단의 경로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협소했으니 대접도 그만큼 다르던 시절이었다.
1977년 2월 한산사의 제천불교청년회법회에서 맑고 올곧은 눈매와 단정하고 준수한 모습의 충청도 선비의 한 전형 같았던 김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그 즈음이다.
당시 제천은 시내의 중앙 로터리에서 의림지로 가는 길이 좁은 비포장일 정도로 한적한 시골의 도시로 문화예술의 불모지나 다름이 아니었던 시절, 제천에서 1976년 제천문학이 태동하여 중앙시장 입구에 있던 종 다방에서 동인들의 첫 시화전이 소박하게 열렸을 때 시민들의 관심은 대단하였다. 이후 제천문학지의 출판기념회가 뜻을 같이 하는 여러 인사들과 함께 하면서 제천 땅에 문학의 정서를 심어가는 역할을 꾸준히 해 나가게 되었다.
제천문학회의 활동이 돋보여 나가고 있던 즈음 문인들의 선망인 신춘문예 등단자인 김 시인의 등장과 합류는 그 인품과 시로써 큰 주목을 받으며 제천문학의 위상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나는 당시 제천문학회의 회원들을 존경하면서 부러워만 했을 뿐 같이 글을 쓴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내고서 그저 작은 후원과 함께 행사의 참여만 있을 정도로 그 문턱이 아련하게 높기만 한 시절이었다.
김 시인의 신춘문예 등단작 ‘겨울 과수밭에서’는 의림지 주변의 겨울 과수밭들, 모질게 추운 제천의 겨울의 북풍과 한설에 떨고 있는 그 과수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원고지에 옮긴, 수도승의 선시와 같이 맑으면서도 참으로 맛이 있었다.
-겨울 과수밭에서 -
겨울 과수밭에서
고요히 흐르는 해류가 있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빈 나뭇가지는 해초 같이 떠서 흐른다.
이제 비로소 모든 것을 버림으로 해서 얻은 자유.
가만히 귀 기울이면
가라앉은 바다의 허밍 코러스.
눈물겨운 가을햇빛 속에 지탱해오던 풍만한 보람의 과일은
이 수심 모를 공허를 위한 예비.
밤으로 쓸쓸한 혼들이 모여
산호수사이 인어들이 해류에
머리를 헹구듯,
이 고요하고 슬플 것 하나 없는
허무에 머리를 감는다.
아직도 기다림이 남은이여,
봄여름의 푸르던 이파리의 녹운도 다 지워지고
일렁이는 바다의 울음도 다 삭아서
맑은 공허만이 남아있는
이 태고 같은 수심에
너의 마음을 누이렴.
1978년 5월의 어느 따스한 봄날, 의림지 기슭 양지쪽의 묘소가 잔디밭에서 김 시인의 시집 ‘겨울 과수밭에서’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아마 제천문학회 창립 이후 동인으로서 첫 출판기념회로 기억된다. 주로 제천 산야의 정서에서 소재를 찾은 시제를 담은 일백여 편의 작품을 묶어 제천 삼화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하얀 눈송이를 연상시키는 포장과 속지에 담긴 시편들이었다.
참석자라야 제천문학회 회원들(현재 생존 회원으로서 홍석하, 권오봉, 최동욱)과 불교 청년회 몇 사람, 중앙에서 오신 민영, 신경림 두 시인, 시인의 처남이자 친구인 공주의 나태주 시인이 전부였다. 함께한 20여 명은 꼭 예전 봄나들이한 상춘객들의 풍경 같았다. 비록 조촐한 자축의 출판기념회였지만, 마치 문학인들의 봄 풀꽃의 향기와도 같은 정서가 훈훈하여 그 분위기는 참으로 푸근하여 격의가 없었던 행복한 자리였다. 종일 사모님이 담근 사과주의 술잔이 줄줄이 도는 가운데 노래도 이야기도 웃음도 길었던 대자연의 공간 속에서의 시집출간 기념회는 나의 머릿속에 전설처럼 아련하게 잡힐 듯 자주 떠오르곤 한다.
1980년 나의 도반이자 스승이었던 김 시인은 또 하나의 꿈인 판검사를 위한 다음 단계인 3급 사법공무원직에 합격하고서 봉화 등기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5년 남짓의 제천 생활로부터 떠나게 된다. 그렇게 김 시인의 변신의 꿈은 끝이 없었다(그 무렵 자신의 이름을 김기종에서 김동현으로 개명하게 된다).
그 해 어느 날 우리 집에서 김 시인과 함께 여러 지인들이 모였을 때 서로 간 주담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얼마 전 작고하신 동국대 사학과의 김상현 교수가 김 시인을 쏘아보며 ‘김 선생’하고 불러놓고는, ‘지금 판검사가 되려고 그 공부에 매여 있다고요? 판검사가 그렇게 좋아 보이요? 아니 시로서 세계를 얻고서 인생을 멋지게 살아야지 판검사로서 무슨 특별한 인생을 얻겠다고 거기에 매달리는 거요. 난 김 선생한테 실망 했소’라며 인연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화살을 날리는 바람에 분위기는 살얼음이 되었다. 김 시인의 과욕의 미래를 예견한 듯 김상현 교수의 직관의 화살이 깊은 인상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김 시인은 그 다음해 드디어 사법시험에 합격 하여 시를 쓰는 인권변호사로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고 그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더불어 정치 거물 전모 의원의 권유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나를 비롯한 제천문학회와의 관계는 옛정마저 색이 바랄 정도로 소원해져갔다. 불교수행자이자 시인이자 인권변호사이며 그림에 악기 연주까지 풍요로웠던 김 시인의 인생 여정에 정치의 길은 분명 외도인데 하는 우려는 나만의 걱정이 아니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있었던 재가불자의 모임에 몇 년 만에 만난 김 시인의 눈빛과 몸짓은 오직 정치의 꿈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인상을 풍기었다.
안산에서 출마한 국회의원과 시장 후보를 여러 차례 낙선 하고선 그 충격은 얼마였을까. 가족을 비롯한 주변 지인들의 안타까움을 뒤로한 채 김 시인은 뇌출혈로 몸을 누이게 되었다. 점차 건강을 회복하면서 재생의 길을 걷고자 하는 모습이 역력했었다. 문경에 절을 짓고서 참선수행을 하면서 다시 창작의 에너지를 충전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웠다.
손수 목재를 구입하여 한옥으로 법당과 요사를 거의 다 지어놓았을 무렵, 운명의 중독 같은 외도의 길은 너무 길었고 한창 번쩍이던 시상을 키워 갈 수 있었던 황금기를 놓친 채로 소진한 창작력과 체력을 채우기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재발된 뇌출혈로 2년 가까운 병석을 털지 못하고 70세의 일기로 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언급의 가치도 없건만 김 시인이 그 다재다능한 예술로 삶을 풍미하며 인권변호사로 사회 정의를 구현하며 여일히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김 시인이시여, 당신은 아직 펼치지 못한 꿈이 너무나 많으십니다. 부디 다시 오시어 만해의 후예들답게 수행자로서 시인으로서 실천가로서 이 사바에 그윽한 연꽃 향기 가득 내 뿜으소서. 김 시인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옛 법우로부터.
(이글은 2013년 제천문학71집에 실릴 특집청탁으로 쓴 것을 먼저 올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