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성巴城설창수薛昌洙시인 탄신 1백주년 추모의 마음. -김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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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16.10.04 조회4,517회 댓글2건본문
파성巴城설창수薛昌洙시인 탄신 1백주년 추모의 마음. -김연호-
이글은 2016년9월27일 제천예총 아카데미의 특강원고임
저는 이 시간 올해로 탄신 1백년을 맞으신 진주의 고 파성 설창수 시인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좀하고자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근래 들어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 각종 지방예술제의
그 효시는 지금부터 67년 전인 1949년 진주에서 시작한“개천예술제”입니다.
이를 발상하고 창제한 분이 진주의 大人 파성 설창수 시인 이란 사실입니다.
파성 선생님은 개천예술제추진위원장을 비롯한 경남일보 사장, 해인대학 교수, 서정주 시인에
이은 제2대 문교부예술과장, 국회의원 등을 지낸 분으로 경남지방에선 전설 같은 큰 바위 얼굴 이었습니다.
오늘날 진주가 역사의 고장으로서 근세문예부흥의 발상지로서 자리 매김하기 까지는 설창수 시인의 노력을
빼놓고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의 고향은 진주의 서편 70키로 거리에 있는 경남 하동군 진교면의 작은 산골 마을입니다.
한 30여 호가 사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라 어린 시절 장래의 꿈에 대한 자극이 비교적 적었던 그런 주변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선지 전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의 설문조사에서 “고물장수” 라고 적어 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본 담임선생님은 저를 참 솔직하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 희망을 썼다며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모아놓은 고물들 중에 우연찮게 돈이 되는 게 들어있어 횡재하는 참 소박한 꿈의 고물장사지요.
(그런 잠재의식에서인지 전 사회로 나온 이후 골동품 수집에 인생을 걸다 시피 하며 살아왔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 할 무렵, 앞으로 한문이나 배워서 동네사람들 토정비결과 결혼하는 사람들 사성,
시제 때 제문 등을 보고 써주면서 고물장사나 하며 살지 뭐 했었습니다.
그런데 순 농부였던 우리 부친의 말씀이 세상이 자꾸 변해 가는데 그래도 중학교 공부는 마쳐야
안 되겠느냐고 하여 진학이 그저 이루어 졌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해발 5백 미터나 되는 재를 넘어야하는 산길 20여리를 걸어서, 소설 “지리산” 작가 이병주 선생의 고향인 하동군 북천에서
버스를 받아 타고 2박 3일간 진주 개천예술제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모친은 34세에 중풍을 얻어 출입이 부자연스러워 돈도 청춘도 잃어버리고 살 때입니다.
그때 부친은 십리 떨어진 진교면의 아침시장에 고구마 한가마니를 져다 판돈으로 밤과 박하사탕을 사고
찰떡을 하여 어깨에 메는 가방에 넣어 여행을 보내 준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그 시절 부모님의 포근한 자식사랑의 행복이 가방 가득했던 참 그리운 여행이었습니다.
전 그때 처음으로 가본 진주는 문화와 교육 예술의 향취가 그윽한 환상 적인 도시로 여린 가슴에 와 닿은 것이
지금도 진주하면 그 시절 그이미지입니다.
개천예술제에서 본 연극과 민속경연대회, 전국고등학교 악대부 경연, 특히 제주 오현 고등학교 악대부의
맑은 아침 진주시내거리 풍악행진은 참 신선하고도 경쾌했습니다.
또한 저의 가슴엔 그림과 서예 사진 전시회 관람 등에서 무언가의 영감이 스쳐왔었습니다.
첫날 새벽에 밖에서 웬 이상한 소리가 들려 여관담장에 매달려 내다보니 남여청년들이 줄을 서서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지나가는 참 신기한 전설 같은 풍경도 보았습니다.
그 한참 뒤에 알고 보니 진주불교청년회원들의 시내거리 새벽 도량석 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진주로 향한 동경심과 이상은 싹이 트기 시작 했습니다.
진주에 가서 공부 하며 살아보는 현실적인 새로운 꿈이었지요.
그 꿈은 고등학교 시절 자칫 건강 때문에 좌절 될 뻔 했었던 위기를 넘어 대학시절이 진주에서 찬연하게 열린 것입니다.
단지 부모님 덕에 중학교를 거쳐 국립경상대학 수의과 20명에 영광스럽게 들어가게 된 것 입니다.
대학 2학년 때 어느 봄날 이었습니다.
통영에 사는 누님 집을 다녀오던 길 중간지점 고성읍 버스정류장에서입니다.
어느 노신사가 한 중년의 아주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라 저의 옆 빈자리를 물어 확인하고서 앉는 것이었습니다.
곧 차는 출발 비포장도로 위로 1시간 30분 거리의 진주로 향했습니다.
전 옆에 앉은 곱슬머리장발에 두 눈과 입가에 위엄의 기운이 가득서린 이 노신사가 은근히 궁금해 졌습니다.
한 3분 정도의 시간의 흘렀을 때에 전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용감하게 물었습니다.
(용감한 곳에 역사가 있고, 준비된 자에게 스승은 나타난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는 경상대학 2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무래도 범상치를 않으신 분 같으시고
또 어디서 많이 뵌 듯도 한데 누구신지요. 라고 묻게 됩니다.
그 선생님 왈, 저를 많이 봤다고요? 그럼 고향이 어디며 중 고등학교는? 지난날 개천예술제에 자주 와보았느냐고 함께 물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여행을 다녀갔었노라고 답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못 보았을 것인데 하며 머리를 갸우뚱 여운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운도 잠시, 대화가 단절되기 전에 한 말씀을 더 붙였습니다.
그럼 혹시 학생이 다닌 초중고등과 대학의 교가는 누가 지었는지를 아시는 가? 고 물었습니다.
(당시 경남과 부산에 있는 많은 학교의 교가를 작곡은 윤이상, 작사는 설창수 이었다.)
전 그 순간 버스좌석에서 자동적으로 반쯤 일어서며 아! 선생님이 파성 설창수 선생님이시지요? 라며 인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전 이때의 행운을 저 생애의 아주 극적인 순간으로서 잊지를 못합니다.
사실 옆에 앉으실 때부터 이분 정도의 모습이면 진주의 전설 파성 설창수 선생님이 아닐까 하는 뭐가 스쳐 그래서 여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간에 확인이 되자 비포장 길을 요동치며 달리는 버스 간에서 한 시간 반을 저 혼자를 대상으로
파성 선생님의 특강이 시작 된 것입니다.
주제는 “의랑 논개 시 비문”에 대한 저의 질문에서 입니다.
당시 저는 문학에 대한 정서가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설창수 시인의 “논개”시가 훌륭하다는 것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고, 또 대학1년 때 무주구천동에서
열린 대학생불교연합회 제1회 화랑대회의 장기자랑에서 김상현(전 동국대 교수)형이 무릎을 꿇고서 암기한
논개 시의 낭송은 전국에서 모인 150여 명의 가슴에 전율적인 감동을 주어 더욱 충격이었지요.
그래서 좀 당돌하지만 어떻게 그 훌륭한 시를 쓰시게 되었느냐는 저의 물음에서 버스 칸에서의
파성 대시인의 홀로 대상 특강은 출발 한 것입니다.
아무리 명성이 있는 분이라도 자기를 인정해주는 진정한 칭찬의 자리 앞에서는 자신을 솔직하게 들어내
보이는 순수와 평화만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육순의 파성 대시인께서 풋내기 청년 한사람을 옆에 두고 그것도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의 버스 칸에서
“의랑 논개 시 비문”을 쓰게 된 배경을 마치 누에가 비단 실을 줄줄이 토해내듯 이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버스 칸 안에서의 열정의 파성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자주 어리고 그립습니다.
인생은 점점이 그리움인데 더구나 자기에게 영감을 주었다면 더하지요.
불후의 명시 “의랑 논개 비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593년 진주남강 義岩 위에서 임진왜란의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꼭 껴안고서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6甲 360년을
맞는 1953
댓글목록
권순관님의 댓글
권순관 작성일독재(박정희 정권)와 不義에 타협하지 않은 지조의 시인 파성 (설창수)선생의 고매한 인품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분의 문학성과 그분의 이땅에 남긴 한량없는 업적이 저평가 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지나 분노를 느끼게 하군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군관민이 똘똘 뭉쳐 왜적을 물리치고 2차 전투에서는 모든 양식은 물론 왜적을 향해 던지던 돌멩이 까지 소진되어 모든 시민이 마지막 까지 같이 싸우다가 죽자고 맹세하고 백병전을 벌리다가 진주 성곽내 무릇 수껏은 모두 전사 했다는 슬픈 역사, 이조말 수령방백의 횡포에 진주민란이 일어나서 또다시 기개 있는 의로운 이들이 다죽어 , 지조 있고 뜻있는 의로운 사람의 氣가 꺽여 진주정신이 소멸된줄 알았는데 파성 선생이 그런대로 명맥을 이어 준것 같네요!
부산이성균님의 댓글
부산이성균 작성일
1960년대 후반 진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개천예술제를 할 때면 학교 전교생이 저녁에 촛불 켠 유등을 들고서 시내를 행진해서 남강물에 유등을 띄우며 유등 축제를하고 개천예술제 기간에는 진주 시내가 온통 축제 분위기로 지냈었던 근 50여년전의 추억들이 엊그제의 일 들처럼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그 개천예술제를 창시한 분이 설창수 선생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던 바이지만 김연호 형님께서 논개사당앞 비문에 얽힌 비사들과 함께 올린 명문장의 글을 읽노라니 설창수 선생의 대인에 대한 기개와 선구자적인 혜안과 업적에 찬사와 존경을 더하게 합니다.
이제는 가시고 추억만 남아있을 선생에 대한 존경과 정이 더하실 연호형님의 건강과 가내 만복을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