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말씀 받들지니 우리 모두의 기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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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익채 작성일2003.08.18 조회5,008회 댓글0건본문
-깨침의 샘- (양산 통도사 월간 등불 2003년 9월호)
부처님 말씀 받들지니 우리 모두의 기쁨이라
현익채 / 금정중 교법사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추억의 깊이를 더 느낀다. 마음에 새겨진 빛 바랜 추억들이 곱게 다독여지는 지금, 겨레 형제 불 보살님 모든 佛子님의 크신 은혜에 머리 숙인다.
지나 온 35년 불교활동의 발자취를 정리할려니 스스로 공치사를 하는 것 같아 망설임도 없지 않았으나, 부산의 최근 불교계 흐름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전법의 사명을 고취하는 뜻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어머님의 100일 기도로 태어났다 하지만 대학 입학 때까지 불교를 제대로 접해 보지 못하다가, 1969년 3월 부산대학교 불교학생회에 가입한 것이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줄이야.....
매주 실시하는 법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불교를 배우다가 첫 수련대회인 범어사 하계 수련대회에 참석했는데 새벽 예불, 참회 정진, 스님의 법문은 불법의 위대함을 가슴 깊이 새기며 불심을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에는 본의 아니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부산지부장을 맡아 500여명 법우의 심부름을 하면서 불교 중흥의 원력을 키우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섬 마을 선생님으로 2년간 근무하다가, 범어사에서 설립한 금정중학교에 75년 부임한 것은 불 보살의 가호요 포교에 보다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을 갖게 되었다. 매일 아침 교직원 조례는 삼귀의로 시작하며, 교내 법당에서 종교수업을 갖고, 명상의 시간, 수련대회, 수계식과 교직원 및 학부모 법회 등을 실시하면서 건학이념을 구현하는 파수꾼으로 교법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73년 대불련을 졸업했던 법우들을 중심으로 부산불교홍법회를 창립했는데, 2년 뒤 필자가 회장을 맡아 내성초등하교 교사인 이미애 동문과 함께 법륜사에서 70여명의 회원으로 불교 어린이회를 창립한 것이 부산에서 최초의 어린이 불교단체로 출발하였다.
75년에는 부산불교홍법회 이름으로 「부산시 대학생 불교연합회 10년사」를 발간했는데, 5개월간 각고의 노력끝이라 결실의 보람은 흐뭇한 일이었다.
이처럼 불교 일이면 그냥 좋아 분에 넘치게 여러 불교단체의 실무를 맡다 보니, 모임은 매일 계속되었고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의 귀가길이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당시 부산의 중·고등학생 포교는 정관스님과 고인이 되신 김태유 선생님께서 헌신적으로 지도하고 있었는데, 필자도 연등불교학생회를 지도하면서 부산불교학생연합회 지도위원(뒤에 총무간사, 회장)으로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었다.
84년에는 중학생 불자의 효과적인 포교를 위하여 부산불교중학생연합회(총재 : 법륜사 주지 보해스님)를 창립하였으니, 전국 최초의 중학생 불교연합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후 10년 간 청소년 불교단체는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고등학생 체육대회때는 1,000여명 이상이 참석하여 응원열기는 하루 종일 가득 찼고, 독경대회·교리문답대회를 위해서는 한 두달전부터 학생들이 매일 절에 모여 연습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모든 조직은 인적·물적 자원의 뒷받침이 필수라고 한다면, 그런 점에서 필자는 참으로 좋은 여건 속에서 활동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부처님의 가피이리라.
부산 불자의 높은 신심으로 부산 불교계는 전국에서 가장 조직이 잘 되었는데, 93년 당시에는 어린이회 53개, 중학생회 22개, 고등학생회 54개, 대학생회 22개로 부산의 불교단체는 400여 개로 조사되어 한국불교의 메카임을 실감했다. 그러니 연합행사를 1년에 몇 번을 해도 인원 동원이나 행사 경비에는 큰 걱정 없이 치룰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청소년 불자의 신심도 줄어 현재 대부분의 사찰 학생회는 사라지고, 대불련이나 청년회는 신입회원이 거의 없어 법회 마저 어려운 실정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81년부터 부산불교신도회 임원으로 활동했는데 88년 당시 상임부회장이던 하도명화 보살께서 부산불교신도회 상근 요원으로 일할 것을 권해왔다. 필자는 부산불교센타의 꿈을 실현하고자 학교를 그만 두기로 결심했으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결국은 학교에 남게 되었다.
하도명화 보살은 1년 뒤 20억 정도의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출연하여 문화부로부터 재단법인 불심홍법원의 설립허가를 받았다.
필자는 창립부터 12년 간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홍법대상 표창, 장학금 지급, 청소년 불교단체 및 지도자 지원, 문화탐방 등에 약 3억원의 포교비를 목적사업으로 지출하였고, 홍법 총서로 9종의 포교책자(부산불교총람, 부산불교계 인명록 등) 34,500부를 발간하여 법보시하였다.
88년 7월 창립된 부산불교 운전 기사회는 불교교육대학 박주천 부학장, 불교신도회 우학수 사무국장이 산파역을 맡았는데, 필자는 발기취지문과 정관작성으로 일조하기도 했다.
82년 설립된 부산불교교육대학은 조계종에서 실시하는 포교사 고시에 매년 최다합격을 자랑하고 있는데, 필자는 이하우 학장을 보필하면서 13년째 총무처장을 맡아 불교학과, 교리반, 경전연구과정, 수화반에 재학 중인 450여명의 재가 불자 교육에 일익음 담당하고 있으며 그 교육 열기의 진지함으로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전법활동에 크나큰 시련이 있었으니 94년 2월 말 생전 처음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위궤양으로 치료하던 의사가 위종양 초기라고 말할 때는 엄청난 충격으로 그날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산대학병원으로 옮겨 3월 28일 수술 날짜를 받았어도 불 보살의 가호를 믿었기에 마음은 평온하였다. 위 절제 수술로 오장육부가 온전치 못한 몸인데도 수술 4일 후 밥 한 그릇을 먹는 것을 본 담당의사는 처음 보는 일이라며 놀라기도 하였다.
2주 뒤 퇴원하여 남보다 더 많은 식사를 하며 9년이 지난 오늘까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불 보살과 모든 분의 은혜라 생각한다. 당시 필자의 쾌차를 기원하며 문병 온 400여명 불자의 물심양면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결혼 후 매일 늦게 귀가하는 남편에게 지극 정성 간호해 준 무념화 보살에게도 고마운 뜻을 잊지 않고 있다. 이 고마움에 보답하는 길은 전법에 더욱 노력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2년 전부터는 인터넷 포교의 일환으로 연등불교학생회 제자의 도움을 받아 개인 홈페이지(bulja.co.kr)도 개설하였고, 500여명 불자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시켜 한 달에 한번 이상 불교 동영상 자료도 보내고 있는데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열반에 드는 순간까지 제자 수바드라를 교화하셨던 부처님을 본받아, 우리 모두 부처님 말씀 받들며 전법의 사명을 다하는 여래사가 되기를 다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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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익채님은 부산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금정중학교 교법사로 근무하면서 부산불교교육대학총무처장, 대불련 총동문회 부의장 등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 <부산시대학생불교연합회 10년사> <부산불교안내> <부산불교총람> <청소년법회 길잡이>(공저) <부산불교계 인명록> <불자신행의 길잡이>(공저) 등이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 받들지니 우리 모두의 기쁨이라
현익채 / 금정중 교법사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추억의 깊이를 더 느낀다. 마음에 새겨진 빛 바랜 추억들이 곱게 다독여지는 지금, 겨레 형제 불 보살님 모든 佛子님의 크신 은혜에 머리 숙인다.
지나 온 35년 불교활동의 발자취를 정리할려니 스스로 공치사를 하는 것 같아 망설임도 없지 않았으나, 부산의 최근 불교계 흐름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전법의 사명을 고취하는 뜻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어머님의 100일 기도로 태어났다 하지만 대학 입학 때까지 불교를 제대로 접해 보지 못하다가, 1969년 3월 부산대학교 불교학생회에 가입한 것이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줄이야.....
매주 실시하는 법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불교를 배우다가 첫 수련대회인 범어사 하계 수련대회에 참석했는데 새벽 예불, 참회 정진, 스님의 법문은 불법의 위대함을 가슴 깊이 새기며 불심을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에는 본의 아니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부산지부장을 맡아 500여명 법우의 심부름을 하면서 불교 중흥의 원력을 키우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섬 마을 선생님으로 2년간 근무하다가, 범어사에서 설립한 금정중학교에 75년 부임한 것은 불 보살의 가호요 포교에 보다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을 갖게 되었다. 매일 아침 교직원 조례는 삼귀의로 시작하며, 교내 법당에서 종교수업을 갖고, 명상의 시간, 수련대회, 수계식과 교직원 및 학부모 법회 등을 실시하면서 건학이념을 구현하는 파수꾼으로 교법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73년 대불련을 졸업했던 법우들을 중심으로 부산불교홍법회를 창립했는데, 2년 뒤 필자가 회장을 맡아 내성초등하교 교사인 이미애 동문과 함께 법륜사에서 70여명의 회원으로 불교 어린이회를 창립한 것이 부산에서 최초의 어린이 불교단체로 출발하였다.
75년에는 부산불교홍법회 이름으로 「부산시 대학생 불교연합회 10년사」를 발간했는데, 5개월간 각고의 노력끝이라 결실의 보람은 흐뭇한 일이었다.
이처럼 불교 일이면 그냥 좋아 분에 넘치게 여러 불교단체의 실무를 맡다 보니, 모임은 매일 계속되었고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의 귀가길이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당시 부산의 중·고등학생 포교는 정관스님과 고인이 되신 김태유 선생님께서 헌신적으로 지도하고 있었는데, 필자도 연등불교학생회를 지도하면서 부산불교학생연합회 지도위원(뒤에 총무간사, 회장)으로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었다.
84년에는 중학생 불자의 효과적인 포교를 위하여 부산불교중학생연합회(총재 : 법륜사 주지 보해스님)를 창립하였으니, 전국 최초의 중학생 불교연합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후 10년 간 청소년 불교단체는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고등학생 체육대회때는 1,000여명 이상이 참석하여 응원열기는 하루 종일 가득 찼고, 독경대회·교리문답대회를 위해서는 한 두달전부터 학생들이 매일 절에 모여 연습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모든 조직은 인적·물적 자원의 뒷받침이 필수라고 한다면, 그런 점에서 필자는 참으로 좋은 여건 속에서 활동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부처님의 가피이리라.
부산 불자의 높은 신심으로 부산 불교계는 전국에서 가장 조직이 잘 되었는데, 93년 당시에는 어린이회 53개, 중학생회 22개, 고등학생회 54개, 대학생회 22개로 부산의 불교단체는 400여 개로 조사되어 한국불교의 메카임을 실감했다. 그러니 연합행사를 1년에 몇 번을 해도 인원 동원이나 행사 경비에는 큰 걱정 없이 치룰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청소년 불자의 신심도 줄어 현재 대부분의 사찰 학생회는 사라지고, 대불련이나 청년회는 신입회원이 거의 없어 법회 마저 어려운 실정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81년부터 부산불교신도회 임원으로 활동했는데 88년 당시 상임부회장이던 하도명화 보살께서 부산불교신도회 상근 요원으로 일할 것을 권해왔다. 필자는 부산불교센타의 꿈을 실현하고자 학교를 그만 두기로 결심했으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결국은 학교에 남게 되었다.
하도명화 보살은 1년 뒤 20억 정도의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출연하여 문화부로부터 재단법인 불심홍법원의 설립허가를 받았다.
필자는 창립부터 12년 간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홍법대상 표창, 장학금 지급, 청소년 불교단체 및 지도자 지원, 문화탐방 등에 약 3억원의 포교비를 목적사업으로 지출하였고, 홍법 총서로 9종의 포교책자(부산불교총람, 부산불교계 인명록 등) 34,500부를 발간하여 법보시하였다.
88년 7월 창립된 부산불교 운전 기사회는 불교교육대학 박주천 부학장, 불교신도회 우학수 사무국장이 산파역을 맡았는데, 필자는 발기취지문과 정관작성으로 일조하기도 했다.
82년 설립된 부산불교교육대학은 조계종에서 실시하는 포교사 고시에 매년 최다합격을 자랑하고 있는데, 필자는 이하우 학장을 보필하면서 13년째 총무처장을 맡아 불교학과, 교리반, 경전연구과정, 수화반에 재학 중인 450여명의 재가 불자 교육에 일익음 담당하고 있으며 그 교육 열기의 진지함으로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전법활동에 크나큰 시련이 있었으니 94년 2월 말 생전 처음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위궤양으로 치료하던 의사가 위종양 초기라고 말할 때는 엄청난 충격으로 그날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산대학병원으로 옮겨 3월 28일 수술 날짜를 받았어도 불 보살의 가호를 믿었기에 마음은 평온하였다. 위 절제 수술로 오장육부가 온전치 못한 몸인데도 수술 4일 후 밥 한 그릇을 먹는 것을 본 담당의사는 처음 보는 일이라며 놀라기도 하였다.
2주 뒤 퇴원하여 남보다 더 많은 식사를 하며 9년이 지난 오늘까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불 보살과 모든 분의 은혜라 생각한다. 당시 필자의 쾌차를 기원하며 문병 온 400여명 불자의 물심양면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결혼 후 매일 늦게 귀가하는 남편에게 지극 정성 간호해 준 무념화 보살에게도 고마운 뜻을 잊지 않고 있다. 이 고마움에 보답하는 길은 전법에 더욱 노력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2년 전부터는 인터넷 포교의 일환으로 연등불교학생회 제자의 도움을 받아 개인 홈페이지(bulja.co.kr)도 개설하였고, 500여명 불자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시켜 한 달에 한번 이상 불교 동영상 자료도 보내고 있는데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열반에 드는 순간까지 제자 수바드라를 교화하셨던 부처님을 본받아, 우리 모두 부처님 말씀 받들며 전법의 사명을 다하는 여래사가 되기를 다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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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익채님은 부산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금정중학교 교법사로 근무하면서 부산불교교육대학총무처장, 대불련 총동문회 부의장 등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 <부산시대학생불교연합회 10년사> <부산불교안내> <부산불교총람> <청소년법회 길잡이>(공저) <부산불교계 인명록> <불자신행의 길잡이>(공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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