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의 이름은 영원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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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연호 작성일2015.02.07 조회3,962회 댓글1건본문
우리 원시인류는 7백만 년이란 긴 세월 동안 별로 변함이 없는 기나긴 행보를 계속 했었다고 한다. 이후 인류문명에 최고의 선물이라고 할 불의 발견 이래로 극히 미미했던 진보는 차츰 속도를 더했다는 고생물학자들의 주장이다. 길고 긴 선사시대는 2천년 전후를 시점으로 차츰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역사시대로 들어서고 현재에 이른다.
이 역사시대 위에 문자로 가장 많이 남겨진 기록은 무엇일까? 내가 불현듯 이런 의문을 떠올려 보게 된 것은 인도의 중부 ‘아우랑가바드’의 ‘아잔타 불교석굴’과 ‘보팔’에 있는 ‘불교 스투파 산치대탑’을 찾았던 때였다. 그곳에서 ‘바로 우리의 이름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게 아니랴’하는 암시를 받은 듯 했었다.
이미 10년 전에도 한번 다녀온 봐가 있었던 인도 아잔타 석굴사원은 1세기 전후 무렵 무려 7백년간이나 계속 조성된 완벽한 채색 석굴사원이었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쇠퇴로 점점 잊히고 방치된 지 1100여 년 만인 1819년 어느 날이었다. 동인도 회사에 근무하던 영국군 존 스미스의 호랑이 사냥 길에 우연찮게 발견되어 긴 잠에서 깨어나듯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를 영원히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호화찬란한 불화의 10번 석굴 벽면 한 곳에는 ‘존 스미스’란 영문 이름이 긁어져 마치 비단에 파리똥 같이 볼썽사납게 흠집으로 남아있었다. 물론 오랜 잠에서 다시 세상의 빛을 보고 조명을 받게 한 공덕이야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본래 잘 있던 것을 우연찮게 호랑이가 숨은 굴을 찾기 위하여 정글을 후비고서 찾아 들었다가 놀라서 세상에 알린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무엄하게 시리 자기의 공을 애써 기록해 놓으려는 듯 인류 문화예술의 보고의 채색불화를 손상해가며 자기의 이름을 긁어 놓아야했을까 싶었다. 이는 분명 문화재 파괴의 업을 두고두고 스스로 인정하는 이름일 뿐이었다.
이에 대한 아쉬움이 아직 뇌리를 떠나지 않던 중, 16번 굴에 들어서자 채색벽화는 더욱 찬란했다. 아잔타 석굴 중에서 가장 환상적인 벽화들로 가득하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듯 했다. 특히 ‘죽어가는 공주의 모습’ 앞에선 나는, 출가 수행자를 둔 부모로서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만 볼 수는 없었다. 붓다의 이복동생인 ‘넌다’가 출가를 결심하자 그의 아내인 ‘순다리’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죽어가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벽면을 지나 한 우람한 돌기둥 한 면 채색이 지워진 자리에 숨은 듯 살며시 내민 문자가 있었다. 4세기 인도 중부에서 사용되었던 ‘브라허미’ 문자라고 했다. 이는 시주자의 이름이라고 밝혀졌다는 가이드 박 선생의 설명이었다. 아! 예나 지금이나 시주자의 이름을 남겨놓는 것은 변함없는 중생심이었구나 싶었다.
아잔타를 둘러보며 이런 상념에 젖었다. 저 거대한 석굴을 몇 백 년을 걸쳐 파고 불화로 장엄하기까지에 당연히 수반되었을 엄청난 비용을 누가 감당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당시 인도의 한 지역에 살았던 대부호의 시주자였을까, 아니면 일국의 왕이었을까. 일반 시주자에 의존했었다면 여러 곳에 이름자가 보여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이름자로 보이는 문자는 두 곳 뿐이고 보면 불심이 두툼했었던 대를 이은 두 왕정이 이룩해 놓은 것은 아닐는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뒷날 산치 대탑을 찾았을 때다. 불교조각의 진수를 보는 듯 새겨진 장엄의 사방 네 문의 산치 스투파는 보는 순간 잔잔한 환희심이 솟구쳤다. 저 마치 바다와도 같이 넓은 평야 중심에 우뚝한 저 훌륭한 스투파에 넓은 사원의 흔적들이 경이로웠다. 설사 현재 인도에는 불교신도가 1프로 미만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부처님의 육신과 마음을 담은 거룩한 자존심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가슴 가득 충만했다.
찬찬히 합장하며 둘러보는 길에서 시주자의 이름인 듯이 보이는 고대인도의 문자들이 석축 곳곳에서 보였다. 특히 사방 문을 지탱하는 원추형의 중방에는 하나하나마다 고대인도 문자를 찾을 수 있었다. 난 여기에서 청정한 시물을 청정하게 주는 자와 청정하게 받는 자와의 소위 삼륜청정의 현장을 유추해 보게 되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공덕을 지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저 많은 중방 난간 하나씩에 시주자를 얻은 주체의 마음이 공덕을 배부르게 느끼어져 오게 했다.
우리나라에선 특히 부처님의 도량에서 하나하나의 불사들에 시주자의 이름을 빡빡하게 새겨놓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때 대체로 이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주었으면 그만이지 꼭 저렇게 중생심을 남겨놓아야 할까’ 하고서 눈살을 찌푸릴 때가 더러 있다. 대개는 시주에 무관한 사람일수록 더 심한 편일 때가 많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준 것은 잊어버려라. 받은 것도 잊어버리마.’ 식의 관계가 최상의 보배인양 이야기 하곤 한다. 허나 불교의 삶은 회향과 그 공덕에 따라 무게가 담기는 것임을 생각해 보면, 시주의 공덕을 영원히 부처님 전에 고하고 기억해 주겠다는 그 순간의 마음이 점점이 영원으로 이어질 뿐, 결코 지워지는 것은 아니지 않으랴 싶었다.
난 아잔타와 산치대탑의 거룩한 불사에서, 2천년이 다 되도록 남아오고 있는 공덕주의 이름들을 보며, 비록 잠깐 왔다가는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지은 공덕은 영원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여 보는 듯 했다.
댓글목록
부산이성균님의 댓글
부산이성균 작성일
그동안 말로만 많이 들어왔었던 아잔타 석굴,,, 그런 사연들이 있었네요,
앞으로 인도 여행, 순례갈 기회가 되면 올리신 글월 잘 되새기면서 참고 하겠습니다.
물론 산치대탑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이고요,,
한 보름이상 설 연휴전까지는 매일 밤 10시, 11시 전후로 퇴근하는 일상 생활이고 보니,
대불련동문회 홈피보고 댓글하나 올리기도 쉽지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