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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태진 작성일2006.06.13 조회3,53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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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삼각지 '국수 한 그릇'

  열흘 전쯤 지방선거 후폭풍과 월드컵 열기에 가린 채 스쳐 지나간 신문기사가 있었다. 경기도 하남의 어느 도시락가게에 갓 스물 젊은이가 찾아와 흰 봉투 하나를 놓고 갔다는 이야기였다. ‘감사합니다’라고 쓰인 봉투엔 12만원이 들어 있었다.

  청년이 4년 전까지 인근 중학교에 다닐 땐 학교에 급식소가 없어 많은 학생들이 이 가게에서 2000원짜리 도시락을 배달받아 먹었다. 그는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값을 내지 못했다가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 갚으러 왔다고 했다. 주인 내외가 한사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봉투를 거두지 않았다.


  청년 못지않게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도시락가게 부부의 말이었다. “그 학교엔 가난한 아이가 많아 못 받은 도시락 값이 한해 500만원을 넘었지요.” 여덟평 가게를 하는 처지로 떼인 돈이 적다 할 수 없겠지만 부부는 당연하다는 듯 회상했다. 외려 “아이가 4년 동안 도시락 값을 가슴에 두고 살았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우동 한 그릇’은 이미 오래 전에 한국인까지 사로잡은 일본 동화다. 해마다 섣달 그믐밤 늦게 우동집에 찾아와 한 그릇만 시키는 어머니와 두 아들을 위해 주인은 면을 더 담아주고 가격표도 낮춰 써놓는다. 세 모자는 주인의 티내지 않는 배려에 삶의 용기를 얻는다. 10여년 뒤 그 어머니와 훌륭하게 장성한 두 아들이 찾아와 우동 세 그릇을 시키자 우동집은 눈물바다가 된다.


  찾아보면 동화보다 진한 실화가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서울 용산의 삼각지 뒷골목 ‘옛집’은 탁자 넷 놓인 허름한 국숫집이다. 할머니가 25년을 한결같이 연탄불로 뭉근하게 우려낸 멸칫국물에 국수를 말아낸다. 10년 넘게 값을 2000원에 묶어놓고도 면은 얼마든 더 준다. 연전에 이 집이 SBS TV에 소개된 뒤 나이 지긋한 남자가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사내는 15년 전 사기를 당해 재산을 들어먹고 아내까지 떠나버렸다. 용산 역 앞을 배회하던 그는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한끼를 구걸했다. 음식점마다 쫓겨나기를 거듭하면서 독이 올랐다. 휘발유를 뿌려 불질러 버리겠다고 맘 먹었다. 할머니네 국숫집까지 가게 된 사내는 자리부터 차지하고 앉았다. 나온 국수를 허겁지겁 먹자 할머니가 그릇을 빼앗았다. 그러더니 국수와 국물을 한가득 다시 내줬다.


  두 그릇치를 퍼넣은 그는 냅다 도망쳤다. 할머니가 쫓아 나오면서 뒤에 대고 소리쳤다. “그냥 가, 뛰지 마. 다쳐!” 그 한 마디에 사내는 세상에 품은 증오를 버렸다. 파라과이로 이민 가서 꽤 큰 장사를 벌인다고 했다.


  시인 함민복은 가난하던 시절 어느 설렁탕집 이야기를 ‘눈물은 왜 짠가’에 한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 없어진 어머니를 친척집에 모셔다 드릴 때 어머니는 아들을 설렁탕집으로 끌었다.


 ‘어머니는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도시락가게 부부, 국숫집 할머니, 설렁탕집 아저씨 이야기엔 ‘인간’이 있다.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안다. 그래서 연민을 품고 배려할 줄 안다. 그러나 그 선의를 대놓고 표시하지 않는다. 국숫집 연탄불처럼 뭉근한 사랑이다. 세상 아직 살 만하지 않은가.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

입력 : 2006.06.12 20:42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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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석명용님의 댓글

석명용 작성일

참 흐뭇하고 인간냄새가 진한 사연을 읽게 되어 기쁩니다.
좋은 글 올려주신 강태진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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