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에 거는기대..(오강남).....한국 불교 어떻게 바뀌어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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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경희...퍼옴 작성일2006.12.24 조회3,427회 댓글0건본문
이 글은 오강남교수의 저서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현암사 간)』의 결론, 「끝맺으면서 - 서양에서 보는 한국 불교의 오늘과 내일」 중 <한국 불교에 거는 기대>를 轉載한 것입니다.
필자 오강남 교수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에서 「華嚴의 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Regina 대학교 비교종교학 담당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도덕경』· 장자』· 『예수는 없다』· 『세계종교 둘러보기』등이 있고, 번역서로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등이 있습니다.
전재를 흔쾌히 허락해주신 오강남교수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처음 이 「후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한국 불교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 혹은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좀 길게 써 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불교를 사랑하는 사람이긴 하나 불교가 제 자신의 종교가 아니기에 남의 종교에 대해 지나치게 왈가왈부한다는 것이 조심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심지어 주제넘은 일이라 여겨져 처음 생각을 바꾸고 그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제 충정 어린 관찰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려 합니다.
첫째, 지금 한국 일반 불자 중에서 발견되는 기복 일변도의 신앙 형태가 바뀌리라, 혹은 바뀌었으면 합니다. 서양 그리스도교에서도 이제 믿고 기도만 하면 저 위에 계시는 하느님이나 천사가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를 다 알아서 기적처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식의 믿음을 성숙한 믿음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한국 불교에서도 어느 면에서 자기 개인이나 가족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기적 안녕만을 위하여 비는 것이 종교의 주요 목적인 양 오도하는 이런 기복적 신앙 형태는 지양되리라고, 그리고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을 비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인간이 스스로가 지닌 한계성을 겸허하게 자각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염원이나 기원을 간직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성을 다해 아뢰고 복을 빌더라도 나만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비워 전 우주 공동체와 더불어 살고, 어울려 사는 원대한 화엄적 세계의 구현을 위해 비는 것으로 승화해야 하리라 믿습니다.
둘째, 기복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특히 죽은 이들을 위해 복을 비는 것도 지양되리라 봅니다. 사랑하는 식구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을 위해 종교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런 절박한 상황을 기회로 하여, 그리고 미지의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을 이용하여, 종교가 필요 이상으로 신도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안겨 준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중세 가톨릭에서 교인들이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그들의 죽은 친지들이 즉각 지옥에서 연옥으로 옮겨 가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던 면죄부 제도도 식구를 잃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어느 정도 심리적 위안을 주고 그 슬픔을 이기고 희망을 가지게 한 면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앙에 위배된다고 하여 이를 거부하고 나선 운동이 바로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이었습니다. 가톨릭에서도 그 후 이 제도를 폐기했습니다.
불교에서도 천도재(薦度齋), 우란분재(盂蘭盆齋) 등 사후에 관계되는 예식들이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님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라는 본래의 순기능적 역할에서 벗어나, 불쌍한 사람들에게 지나친 경제적 부담이 되는 등 역기능으로 작용할 경우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사항이라 여깁니다. 이런 예식들의 표피적,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이런 예식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더욱 깊은 정신적, 심리적, 상징적, 효용적인 가치에 더 큰 관심을 쏟고 더 깊은 종교적 의미를 발굴하고 널리 펴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셋째, 이런 형태의 기복이 아니라 더욱 많은 일반 불자가 중심이 된 참선 · 명상 수행이 더욱 보편화되리라, 혹은 보편화했으면 합니다. 물론 참선을 한다고 모두가 당장 확철대오(廓徹大悟)같은 구경의 깨달음, 부처님이 이르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tarasamyak-sambodhi)에 이르리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고려대학교 조성택 교수는 한국 불교가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 바뀔 것을 제안하면서, 한국 불교에서 이런 깨달음 중심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몇몇 예외적인 고승의 경우를 제외하고 이런 깨달음이 불교 수행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이렇게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만 매달리는 것은 일종의 기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조 교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저도 한국 불교에서 몇몇 특출한 고승들이나 얻을 수 있었던 구경의 깨달음이라는 거의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세워 놓고 일반 신도들은 ‘성불하십시오’를 입으로만 외울 뿐 도저히 거기에 합당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주로 기복적인 종교 생활에 매인 듯한 불교 현실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가 덧붙여 강조하고 싶은 것은 참선 · 명상한다고 하여 반드시 이른바 구경의 깨달음만을, 최종적으로 딱 한 번 있을 유일회적(唯一回的) 깨달음만을, 목표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선 수행의 목표나 성공 여부가 결국 이런 구경의 유일회적 깨달음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따라 둘로 갈라질 무엇이라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활연대오, 국경의 깨달음만 유일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만 쳐다보거나 거기에 목을 맬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더욱 크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이른바 ‘깨달음의 민주화 · 대중화’ 혹은 ‘깨달음의 일상화 · 생활화’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적 수행과 마찬가지로, 참선 수행은 마치 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선 정상에 오르는 것만을 목표로 정하고 그때까지는 무조건 죽을 고생을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정상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발걸음 자체에서 이미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더욱이 조금씩 올라가는 데 따라 산 밑으로 전개되는 하계를 내려다보면서 전에 알지 못했던 저 너머의 호수와 언덕과 바다를 발견하고 계속 ‘아하!’를 연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고 즐길 수 있는 ‘깨달음(realization)’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따라 그 전에 가지고 있던 무지와 편견, 집착과 고집에서부터 그만큼 더 자유로워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삶과 세계와 우주에 대한 나의 안목과 통찰이 그만큼 더 넓고 깊어지고, 불교적 용어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things as they really are)', 여실하게 보는 일에 그만큼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깨달음의 연속을 경험하는 것이 불교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행복이고, 이런 것을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으로 즐기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 불교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중요 역할이라 믿습니다. 저는 이런 작은 깨달음의 과정을 즐기면서 삶을 풍요롭게 해 가는 일반 불자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넷째, 이렇게 참선 · 명상을 통해 사물을 될 수 있는 대로 실재에 가깝게 봄으로 무엇보다 지금의 내가 독립적 실재로서의 ‘나’가 아니라는 것, 내가 나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려고 애쓰는 것이 결국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보다 오히려 나와 이웃이 겪고 있는 괴로움의 원천이 된다는 것, 그리고 참된 행복은 남의 괴로움에 동참함으로 가능하다는 것 등을 깨닫는 체험이 불자들에게 더욱 보편적인 체험이 되었으면, 그리고 그렇게 되리라 희망합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현재 이 세계와 동료 인간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직접 참여하고, 이로 인해 한국 사회가 그만큼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곳으로 바뀌게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예불, 염불, 기도, 3천배 등등의 의례(rituals)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나 중심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이를 극복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종교의 본질은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한국 불교도 종교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이런 본질적 기능을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종교로 변모됨으로 한국 사회에 더욱 크게 기여하리라 믿고, 또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한국 불교가 생태계 문제에 좀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리라 믿습니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서양의 불교에서는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공평, 평화의 위협, 남녀 성차별, 성적 성향에 의한 차별, 인권 문제, 생태계 문제 등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실질적 문제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이고 있고, 이런 문제 해결에 불교적 가치관을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한국 불교에 바라는 것은 이런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특히 생태계 문제, 자연보호에 더욱 세심한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한국 불교계가 생태계 문제에 전혀 무관심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만금 사업과 관련하여 수경 스님이 이끈 ‘삼보일배’ 운동이나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반대하여 오랜 단식에 들어갔던 지율 스님의 활동 등에서 보듯이 한국 불교가 생태계 문제를 크게 공론화하는 데 공헌한 면이 있습니다. 이처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법륜 스님의 ‘빈 그릇 운동’, 도법 스님의 ‘인드라 망 생명체 운동’, 동국대학교의 ‘불교 생태학’ 강좌 등도 언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최근 산사로 들어가는 길을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벌이는 도로 확장 및 포장 공사와 무분별하게 난립되는 새로운 사찰 건물에 의한 자연 파괴적 경향, 그리고 부주의한 방생에 의해 야기되는 생태계 질서 교란의 위험 등도 새로이 부각되는 생태계적 관심과 빛 아래에서 범불교적으로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본래 불살생 등 자연친화적 종교입니다. 이제 ‘중생이 아프기에 나도 아프다’는 생각뿐 아니라 ‘어머니 지구가 아프기에 나도 아프다’는 마음을 더욱 깊이 하는 데 불교가 앞장서 줄 것을 기대해봅니다.
여섯째, 한국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현재 새로운 모습으로 재등장하는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신학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서로 배우고 일깨우는 일이 가능해짐으로 불교의 여러 가지 면이 더욱 좋은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한국 불교도 서양 불자의 경우와 같이, 이웃 종교들과 대화하면서 ‘상호 이해’를 증진할 뿐만 아니라,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제반 문제에 함께 대처하고 그 해결을 위해 이들 이웃 종교들과 좀더 적극적으로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까지 나가길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 불교가 지금껏 그리스도교와의 대화에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것에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껏 보여준 배타주의적이고 저돌적인 태도나, 이로 인해 불교계가 입은 실질적 피해를 감안할 때 불교인들이 얼른 손을 내밀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무엇보다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이 이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요청이라는 사실을 새로이 다지고 그리스도교와의 대화에 적극성을 띠게 되기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와 그리스도교, 심지어 유교까지 모두 함께, 불교에서 가르치는 ‘깨침’,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 유학이나 도가에서 주장하는 ‘성인됨’이라는 표현에 함의된 ‘의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이런 의식의 변화가 어떤 구체적 ‘수행’을 통해 인류사회에 더욱 효과적으로 보편화할 수 있을까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종료의 대화에 천도교나 다른 민족종교들을 초청한다면 더욱 좋은 것입니다.
이외에도 종교와 과학의 조화 문제 등에 대한 논의에서도 교리적으로 비교적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불교계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상에 말한 몇 가지 희망 사항이 현실로 가능하게 될 때 불교는 한국 사회에서 진정으로 제 몫을 다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불교포커스 객원칼럼
필자 오강남 교수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에서 「華嚴의 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Regina 대학교 비교종교학 담당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도덕경』· 장자』· 『예수는 없다』· 『세계종교 둘러보기』등이 있고, 번역서로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등이 있습니다.
전재를 흔쾌히 허락해주신 오강남교수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처음 이 「후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한국 불교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 혹은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좀 길게 써 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불교를 사랑하는 사람이긴 하나 불교가 제 자신의 종교가 아니기에 남의 종교에 대해 지나치게 왈가왈부한다는 것이 조심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심지어 주제넘은 일이라 여겨져 처음 생각을 바꾸고 그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제 충정 어린 관찰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려 합니다.
첫째, 지금 한국 일반 불자 중에서 발견되는 기복 일변도의 신앙 형태가 바뀌리라, 혹은 바뀌었으면 합니다. 서양 그리스도교에서도 이제 믿고 기도만 하면 저 위에 계시는 하느님이나 천사가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를 다 알아서 기적처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식의 믿음을 성숙한 믿음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한국 불교에서도 어느 면에서 자기 개인이나 가족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기적 안녕만을 위하여 비는 것이 종교의 주요 목적인 양 오도하는 이런 기복적 신앙 형태는 지양되리라고, 그리고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을 비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인간이 스스로가 지닌 한계성을 겸허하게 자각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염원이나 기원을 간직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성을 다해 아뢰고 복을 빌더라도 나만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비워 전 우주 공동체와 더불어 살고, 어울려 사는 원대한 화엄적 세계의 구현을 위해 비는 것으로 승화해야 하리라 믿습니다.
둘째, 기복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특히 죽은 이들을 위해 복을 비는 것도 지양되리라 봅니다. 사랑하는 식구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을 위해 종교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런 절박한 상황을 기회로 하여, 그리고 미지의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을 이용하여, 종교가 필요 이상으로 신도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안겨 준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중세 가톨릭에서 교인들이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그들의 죽은 친지들이 즉각 지옥에서 연옥으로 옮겨 가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던 면죄부 제도도 식구를 잃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어느 정도 심리적 위안을 주고 그 슬픔을 이기고 희망을 가지게 한 면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앙에 위배된다고 하여 이를 거부하고 나선 운동이 바로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이었습니다. 가톨릭에서도 그 후 이 제도를 폐기했습니다.
불교에서도 천도재(薦度齋), 우란분재(盂蘭盆齋) 등 사후에 관계되는 예식들이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님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라는 본래의 순기능적 역할에서 벗어나, 불쌍한 사람들에게 지나친 경제적 부담이 되는 등 역기능으로 작용할 경우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사항이라 여깁니다. 이런 예식들의 표피적,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이런 예식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더욱 깊은 정신적, 심리적, 상징적, 효용적인 가치에 더 큰 관심을 쏟고 더 깊은 종교적 의미를 발굴하고 널리 펴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셋째, 이런 형태의 기복이 아니라 더욱 많은 일반 불자가 중심이 된 참선 · 명상 수행이 더욱 보편화되리라, 혹은 보편화했으면 합니다. 물론 참선을 한다고 모두가 당장 확철대오(廓徹大悟)같은 구경의 깨달음, 부처님이 이르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tarasamyak-sambodhi)에 이르리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고려대학교 조성택 교수는 한국 불교가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 바뀔 것을 제안하면서, 한국 불교에서 이런 깨달음 중심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몇몇 예외적인 고승의 경우를 제외하고 이런 깨달음이 불교 수행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이렇게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만 매달리는 것은 일종의 기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조 교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저도 한국 불교에서 몇몇 특출한 고승들이나 얻을 수 있었던 구경의 깨달음이라는 거의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세워 놓고 일반 신도들은 ‘성불하십시오’를 입으로만 외울 뿐 도저히 거기에 합당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주로 기복적인 종교 생활에 매인 듯한 불교 현실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가 덧붙여 강조하고 싶은 것은 참선 · 명상한다고 하여 반드시 이른바 구경의 깨달음만을, 최종적으로 딱 한 번 있을 유일회적(唯一回的) 깨달음만을, 목표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선 수행의 목표나 성공 여부가 결국 이런 구경의 유일회적 깨달음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따라 둘로 갈라질 무엇이라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활연대오, 국경의 깨달음만 유일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만 쳐다보거나 거기에 목을 맬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더욱 크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이른바 ‘깨달음의 민주화 · 대중화’ 혹은 ‘깨달음의 일상화 · 생활화’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적 수행과 마찬가지로, 참선 수행은 마치 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선 정상에 오르는 것만을 목표로 정하고 그때까지는 무조건 죽을 고생을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정상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발걸음 자체에서 이미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더욱이 조금씩 올라가는 데 따라 산 밑으로 전개되는 하계를 내려다보면서 전에 알지 못했던 저 너머의 호수와 언덕과 바다를 발견하고 계속 ‘아하!’를 연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고 즐길 수 있는 ‘깨달음(realization)’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따라 그 전에 가지고 있던 무지와 편견, 집착과 고집에서부터 그만큼 더 자유로워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삶과 세계와 우주에 대한 나의 안목과 통찰이 그만큼 더 넓고 깊어지고, 불교적 용어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things as they really are)', 여실하게 보는 일에 그만큼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깨달음의 연속을 경험하는 것이 불교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행복이고, 이런 것을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으로 즐기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 불교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중요 역할이라 믿습니다. 저는 이런 작은 깨달음의 과정을 즐기면서 삶을 풍요롭게 해 가는 일반 불자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넷째, 이렇게 참선 · 명상을 통해 사물을 될 수 있는 대로 실재에 가깝게 봄으로 무엇보다 지금의 내가 독립적 실재로서의 ‘나’가 아니라는 것, 내가 나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려고 애쓰는 것이 결국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보다 오히려 나와 이웃이 겪고 있는 괴로움의 원천이 된다는 것, 그리고 참된 행복은 남의 괴로움에 동참함으로 가능하다는 것 등을 깨닫는 체험이 불자들에게 더욱 보편적인 체험이 되었으면, 그리고 그렇게 되리라 희망합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현재 이 세계와 동료 인간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직접 참여하고, 이로 인해 한국 사회가 그만큼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곳으로 바뀌게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예불, 염불, 기도, 3천배 등등의 의례(rituals)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나 중심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이를 극복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종교의 본질은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한국 불교도 종교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이런 본질적 기능을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종교로 변모됨으로 한국 사회에 더욱 크게 기여하리라 믿고, 또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한국 불교가 생태계 문제에 좀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리라 믿습니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서양의 불교에서는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공평, 평화의 위협, 남녀 성차별, 성적 성향에 의한 차별, 인권 문제, 생태계 문제 등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실질적 문제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이고 있고, 이런 문제 해결에 불교적 가치관을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한국 불교에 바라는 것은 이런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특히 생태계 문제, 자연보호에 더욱 세심한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한국 불교계가 생태계 문제에 전혀 무관심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만금 사업과 관련하여 수경 스님이 이끈 ‘삼보일배’ 운동이나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반대하여 오랜 단식에 들어갔던 지율 스님의 활동 등에서 보듯이 한국 불교가 생태계 문제를 크게 공론화하는 데 공헌한 면이 있습니다. 이처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법륜 스님의 ‘빈 그릇 운동’, 도법 스님의 ‘인드라 망 생명체 운동’, 동국대학교의 ‘불교 생태학’ 강좌 등도 언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최근 산사로 들어가는 길을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벌이는 도로 확장 및 포장 공사와 무분별하게 난립되는 새로운 사찰 건물에 의한 자연 파괴적 경향, 그리고 부주의한 방생에 의해 야기되는 생태계 질서 교란의 위험 등도 새로이 부각되는 생태계적 관심과 빛 아래에서 범불교적으로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본래 불살생 등 자연친화적 종교입니다. 이제 ‘중생이 아프기에 나도 아프다’는 생각뿐 아니라 ‘어머니 지구가 아프기에 나도 아프다’는 마음을 더욱 깊이 하는 데 불교가 앞장서 줄 것을 기대해봅니다.
여섯째, 한국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현재 새로운 모습으로 재등장하는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신학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서로 배우고 일깨우는 일이 가능해짐으로 불교의 여러 가지 면이 더욱 좋은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한국 불교도 서양 불자의 경우와 같이, 이웃 종교들과 대화하면서 ‘상호 이해’를 증진할 뿐만 아니라,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제반 문제에 함께 대처하고 그 해결을 위해 이들 이웃 종교들과 좀더 적극적으로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까지 나가길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 불교가 지금껏 그리스도교와의 대화에 비교적 소극적이었던 것에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껏 보여준 배타주의적이고 저돌적인 태도나, 이로 인해 불교계가 입은 실질적 피해를 감안할 때 불교인들이 얼른 손을 내밀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무엇보다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이 이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요청이라는 사실을 새로이 다지고 그리스도교와의 대화에 적극성을 띠게 되기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와 그리스도교, 심지어 유교까지 모두 함께, 불교에서 가르치는 ‘깨침’,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 유학이나 도가에서 주장하는 ‘성인됨’이라는 표현에 함의된 ‘의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이런 의식의 변화가 어떤 구체적 ‘수행’을 통해 인류사회에 더욱 효과적으로 보편화할 수 있을까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종료의 대화에 천도교나 다른 민족종교들을 초청한다면 더욱 좋은 것입니다.
이외에도 종교와 과학의 조화 문제 등에 대한 논의에서도 교리적으로 비교적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불교계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상에 말한 몇 가지 희망 사항이 현실로 가능하게 될 때 불교는 한국 사회에서 진정으로 제 몫을 다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불교포커스 객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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