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홍준 의원의 32년 전 대불련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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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현익채 작성일2004.06.23 조회4,716회 댓글1건본문
안홍준 의원님
진심으로 국회의원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부산대 같은 69학번으로 재학시절에도 크나큰 원력과 지도력을 기진 법우로 기억됩니다. 17대 대불련 부산지부장을 맡아서는 부산지부를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 동문께서 지부장으로 주최한 졸업생 환송회시 본인은 감격의 눈물을 억제하며 졸업생 답사를 한 것이 주마등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 후 안 동문은 마산에서 병원을 운영하시며 경남지역 시민운동의 대표자로 활동 하시더니, 마침내 금뱃지를 달고 대불련의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긍지를 높이고 있습니다.
대불련 총동문회에서 마련한 축하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죄로,오늘의 지리멸렬한 대불련과 비교하는 의미에서, 님의 32년 전 활동을 본인이 편집했던 <부산시 대학생불교연합회 10년사>에서 인용. 소개합니다.
학창시절이나 지금도 우리는 대불련이라는 일엽편주에 동승한 구도행각의 동반자입니다. 모두에게 불보살의 가호가 충만하게 합소서.
======◀ 17 ▶ 안 홍 준 지부장 시대
━━━━━━━━━━━━━━━━━
*안흥준 지부장 체제
뜻 있는 회원들로부터 지부장직 수락을 종용 받은 안홍준 법우는 의대의 바쁜 일과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10월중 범어사 극락암에서 상기 비상 대책위원들로부터 지부장 수락을 다시 요청 받은 안홍준 법우는 몇 가지 선행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 조건이 받아 들여져 지부장직을 수락했다.
그 때 내세운 선행조건을 보면 지부간부는 지회장 중심으로 하며 자기가 지명하는 간부는 수락해 줄 것 초연 스님을 지도 법사로 추대하는데 동의해 줄 것, 지부장에게 적극 협조해 줄 것 등 4가지 사항이었다.
그래서 부산지부 간부로 다시 사무장제를 신설하여 최병문 법우에게 맡겼는데 안홍준 최병문 법우가 1년간 수고한 덕택으로 부산지부는 다시 범 지부적 위치를 구축하고 활기를 되찾았다.
*1973―
제8차 동계 수련 대회
(1972. 12. 31∼1973. 1. 5)
제8차 수련대회는 영남 지방의 각 지부와 협동으로 진주 다솔사에서 개최했다. 부산지부를 비롯하여 경북지방, 경남지부 및 안동 준 지부와 합동 주최한 이유는 목적을 같이하는 우리 불교인의 보다 폭 넓은 친목도모와 다양한 내용을 위한 시도 이외에도, 단독 주최시 애로점인 지도강사, 법사님의 해결을 꾀함에 있었다.
이번 수련 대회를 부산지부 수련 대회사에 넣어 8차로 한 것은 약간의 문제점이 있긴 하나, 예전 본부 주최 수련 대회시의 단순한 참가가 아니고 부산지부가 적극 주선하고 다수 회원이 참가한 점에서 8차 수련 대회로 했다.
1972년의 한 해가 저무는 제야의 날에 부산역에서 출발하여 진주 다솔사에서 6박 6일로 개최되었는데 참가회비는 교통비를 개인부담으로 하고 1,800원이었다. 지도 교수는 건국대의 이영무 교수가 해 주셨고, 특강으로 이기영 박사, 정중환 박사, 최만술 법사 등이었다.
수련을 통하여 망각의 골짜기에 버려진 자아발견의 因을 마련하고, 참다운 구도자로서 다가오는 새해에는 보다 밝고 전진적인 해가 되길 다짐했다.
* 졸업생 환송 법회(1973. 2. 15)
「주마등처럼 명멸하는 회상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정녕 떠나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따라 가는 길이건만 이토록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어제도 오늘도 만날 수 있었던 정다운 法友들이 내일이면 좀처럼 만나기 어렵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지난날 깜깜히 나부끼는 발심(發心)의 깃대를 같이 들고 다녔던 수백명의 法友들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얼마 남지 않는 우리마저 기약없는 이별을 하고 이 풍진 사바세계를 제나름대로 가야하기 때문입니까? …… (후략) ……」
이 글은 73년 2월 15일 초량 소림사에서 있었던 졸업생 환송 법회때 현익채 법우가 눈물을 억제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읽었던 「답사」의 한 부분이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나기 어렵다. 떠나가는 것은 결코 떠나가는 것이 아니며, 가고 옴이 없는 길을 잠시 분별하고 있을지라도, 정든 부산지부를 떠나는 아쉬움은 졸업생의 가슴 가슴에 젖었고 후배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답사에서 '이 풍진 사바세계'란 말은 잠시나마 화제가 되었다. 이날 환송 법회때 시상을 받은 사람은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수 없으나 현익채, 김경환, 이종군, 송덕숙, 박정옥, 김은희 법우 등으로 기억된다.
* 법회 운영과 사무실
초량 소림사에서 법회를 보았는데 법사로는 운성 스님, 화엄 스님, 초연 스님이 얼마간 나오시다가 양국 스님이 법사로서 설법해 주셨다. 합동 법회때는 많은 회원이 참가했다. 당시 대불련 부산지부 사무실은 최병문 사무장 자택을 사용했으며 방안과 대청마루에 30∼40명씩 모여 매 주 회의를 가지며 차를 들기도 했다.
* 부산 불교 홍법회 발족
오래 전부터 부산지부 동문회 모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결성을 시도 했으나 여의치 않아 실패되었는데 1973년 초부터 본격적인 추진을 하였다.
속속히 맺힌 정, 미지의 힘에 사무쳤던 몇몇 졸업생들이 동문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이덕성, 손제석, 송용수(당시 4년생이었으나 특례를 인정), 이승립, 현익채, 김성해, 김순임, 김언자, 김옥수 법우 등이 1973년 4월 23일 모 중국 요리점에서 동문회 결성에 합의하였다. 임시 대표로 이덕성 법우를 만장일치로 추대하고 매월 셋째 토요일 소림사에서 회합하기로 결정 하고, 매월 빠짐없이 집회를 가졌다.
그 후 1년이 가깝도록 후배들과 같이 모이면서도 우리의 조촐한 모임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고, 후배 육성과 졸업생간의 친목 활동에 그쳤기 때문에 회의 명칭도 구태여 정하지 않았고 회장도 없었다.
그러다가 1974년 2월 16일 졸업생 환송 법회 때 후배들에게 조그만 표창을 할려니 이름이 필요해서 1974년 2월 2일 현익채 법우의 제의로 弘法會라 칭하고, 회장에 이승립 법우를 선출했다.
매월 회비를 받은 돈으로 절약하면서 적은 금액이나마 부산지부에 보조를 하면서 정기 집회를 매월 1회씩 가졌다. 2대 회장에 송용수 법우가 선출되자 홍법회는 금련사에서 초발심경 강의를 김덕수 법사로부터 들었다. 졸업후 2년간 거제군 장승포에 있는 해성중 고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현익채 법우가 부산의 금정중학교로 전근오자 3대 홍법회장에 선출되었다.
현익채 회장은 회원 확보를 우선 목표로 해서 회원수를 늘리고 회칙도 제정했다. 회의 정비와 구도를 도모하면서 홍법 활동에 주력하고자 하는 홍법회는 부산지부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회지 발간과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10년사」편찬에 뜻을 모아 이 막중하고도 어려운 佛事를 불퇴전의 원력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제1회 연합 봉축제
불기 2517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제1회 연합 봉축제가 전회원의 땀 맺힌 노력과 정성스런 협조로 지금까지의 부산지부 행사중 최대의 행사로 개최되었다.
언제 부터인가 본회 명칭이 한국 대학생 불교 연합회 부산지부 보다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로 많이 쓰이기 시작했는데, 봉축 행사는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각 부 주최로 하고 주관은 산하 각 지회가 했는데 11개 행사 중 9행사가 실시되었다. 각 행사를 살펴보면
1) 부처님 오신날 제등 행렬
일시 : 1973년 5월 10일 PM7시
장소 : 대각사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주관 : 부산 불교 청년회
2) 군장병 위안회
일시 : 1973. 5. 10
장소 : 육군 교도소, 국군통합병원,
해안초소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여학생부
주관 : 부산 여대 불교 학생회
3) 불교 서예전
일시 : 1973. 5. 14∼17
장소 : 부산 대학교 화랑
작품 : 고 청담 스님 글 외 70점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총무부
주관 : 부산 대학교 불교 학생회
4) 불교 사상 강연회
일시 : 1973. 5. 19 PM6시
장소 : 부산 데파트 4층 강당
※소형 영화상영(거사림회 제공)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교화부
주간 : 부산 공전 불교 학생회
5) 불교 사상 강연회
일시 : 1973. 5. 19 PM3:30
장소 : 동아 대학교 강당
연사 : 혜곡용해 박사
(일본 불교대학 교수)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조직부
주관 : 동아 대학교 불교 학생회
6) 성지 순례 법회
일시 : 1973. 5. 20
장소 : 기장죽도(AM8시 30분까지 부산역 집합)
회비 : 300원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봉사부
주관 : 부산 의과 대학 불교 학생회
7) 불교 사상 강연회
일시 : 1973. 5. 26 PM3시
장소 : 부전 예식장 2층
연사 : 김종우 박사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주관 : 부산 교육 대학 불교 학생회
8) 무의촌 진료봉사 기금조달 1일 다실
일시 : 1973. 5. 27
장소 : 남포동 입구 "밀"다실
주최 : 부산 대학생 불교 연합회
주관 : 부산시 여전 불교 학생회
9) 부산시 교육감기 쟁탈 제5회 친선 체육대회
일시 : 1973. 6. 3
장소 : 해양 대학 연병장
구기종목 : 배구,축구,Foot base볼
※종합우승 - 동아대 지회
준우승 - 부산 여전
참가팀 : 각 대학 불교 학생회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체육부
주관 : 한국 해양대학 불교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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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큰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는데는 안홍준 지부장을 비롯한 전 간부들의 노고는 대단하였으며 지도위원이신 강석진 신도회장, 김석배 거사림 회장, 석암 큰스님, 송병진 변호사, 조정관 범어사 주지, 한영석 부산 선거 관리 위원회 상임위원 등의 지도 편달도 적지 않았다.
행사 경비는 신도 보조 및 스폰서로 충당되었는데 참고로 밝혀둔다.
부산 불교 신도회장 강석진 10,000
부산 불교 거사림회장
김석배,이인희 15,0000
경남 고등학교 교장 이윤근 10,000
해동 고등학교 교장 김용호 10,000
변호사 송병진 10,000
삼성 약국 오명수 50,000
성도 여관 임성덕행 10,000
고려 불교서원, 고려범종
사장 김병수 10,000
국제주유소 10,000
소림사 주지 이정일 10,000
창선 아케이트 국제사 5,000
피보 약국(부산역 앞) 10,000
고려당 표구사 대표 박용곤 3,000
부산 화랑 송순석 5,000
보원장 대표 이문자 <상당액>
부산 불교 홍법회 10,000
그 밖에 일일 다실 수입금 4만원을 합쳐 총30여만의 큰 경비로 제1회 봉축제를 성공리에 마쳤다. 봉축제 행사 안내 팜플렛은 스폰서 때문에 당일 아침에 나왔는데 팜플렛 맨 뒷면의 광고는 하나도 수입이 없었다 한다.
봉축제의 각 행사는 일일이 설명 붙이는 것을 지면 관계로 생략하나 한 두가지 에피소드를 적어본다. 제등행렬에 있어 대학생들이 대각사에서 행하는 제등행렬을 도와 주고 교통정리등에 협조해 주었으나 끝에 경비 문제로 싸움 아닌 말다툼이 있었다. 또 무의촌 진료 봉사를 위한 일일 다실을 밀 다실에서 개최했던 바 계약은 35,000원인데 그날 수입은 40,000원 이었다. 서예 전시가 곁들여 진행되었는데 국회의원 박창종씨 비서가 찬조금을 주기도 했다. 1일 다실이 끝나 오후 늦게 서예품을 대신동 박만탁씨 집에 갔다 주고 나오니 12시 5분 전이었다.
최병문 법우는 걸어오다가 대청 파출소에 야통 위반으로 걸려 즉결 넘어가기 직전 익일 아침 8시에 풀려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영도지부 원불교 청년회와 좌담회를 개최코자 했으나……
부산지부가 원불교 영도지부와 좌담회를 개최키로 하고 약속대로 안홍준 지부장 등 10여명이 원불교 영도지부에 갔으나, 시작은 7시인데 도착한 시각은 6시 30분이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약속을 어기고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아 부산지부 회원은 그냥 돌아왔다.
그때 원불교에 기증하려고 가지고 갔던 거울은 현재 최병문 법우 집에 보관중이다.
* 만해 한용운 전집 보급 활동
민족 독립 운동가요 위대한 시인이며 불교계 지도자였던 님의 묘소가 망우리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버려져 있는 것을 본 한국대학생 불교 연합회는 만해 동산 건립과 묘지 이전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만해 한용운 전집 보급 활동을 1973년 6월 15일 부터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부산지부는 이 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여름 방학 중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안홍준 지부장과 최병문 사무장을 비록한 간부들이 관공서나 사찰로 책 보급에 나섰다. 사찰을 방문 할때는 범어사 주지의 위임장을 가지고 갔으며, 대각사에는 주지스님과 말타툼이 있기도 했다.
간부들의 노력으로 100여질 팔았으니 그 성과는 서울지부를 빼면 타 지부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이다.
*산악부 발족
부산지부에는 회원끼리 불교적 모임외에도 산악부 같은 써클이 최병문 사무장의 주곤아래 발족되어 회원들의 심신단련과 유대강화를 꾀했다. 73년 9월 둘째 화요일에는 김해 신어산과 무척산에 등산을 갔는데 최병문, 정순화, 김정희 법우 등 많은 사람이 참가했다.
*지회 활동 강화
부산 지부 하기 수련대회는 안하는 대신 각 지회별로 수련대회, 봉사 활동이 많았다. 부산대가 73년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순천 송광사에서 수련대회를 했고, 동아대 지회도 표충사에서 하계 수련대회를 개최했다. 부산의대 지회는 7월 27일부터 의료 봉사를 했고, 교대 지회도 7월 22일부터 27일까지 봉사 활동을 했다. 또한 부산 공전 지회도 성불사에서 8월 8일부터 13일까지 하계수련대회를 가져 지회 활동이 강화되었다.
진심으로 국회의원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부산대 같은 69학번으로 재학시절에도 크나큰 원력과 지도력을 기진 법우로 기억됩니다. 17대 대불련 부산지부장을 맡아서는 부산지부를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 동문께서 지부장으로 주최한 졸업생 환송회시 본인은 감격의 눈물을 억제하며 졸업생 답사를 한 것이 주마등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 후 안 동문은 마산에서 병원을 운영하시며 경남지역 시민운동의 대표자로 활동 하시더니, 마침내 금뱃지를 달고 대불련의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긍지를 높이고 있습니다.
대불련 총동문회에서 마련한 축하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죄로,오늘의 지리멸렬한 대불련과 비교하는 의미에서, 님의 32년 전 활동을 본인이 편집했던 <부산시 대학생불교연합회 10년사>에서 인용. 소개합니다.
학창시절이나 지금도 우리는 대불련이라는 일엽편주에 동승한 구도행각의 동반자입니다. 모두에게 불보살의 가호가 충만하게 합소서.
======◀ 17 ▶ 안 홍 준 지부장 시대
━━━━━━━━━━━━━━━━━
*안흥준 지부장 체제
뜻 있는 회원들로부터 지부장직 수락을 종용 받은 안홍준 법우는 의대의 바쁜 일과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10월중 범어사 극락암에서 상기 비상 대책위원들로부터 지부장 수락을 다시 요청 받은 안홍준 법우는 몇 가지 선행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 조건이 받아 들여져 지부장직을 수락했다.
그 때 내세운 선행조건을 보면 지부간부는 지회장 중심으로 하며 자기가 지명하는 간부는 수락해 줄 것 초연 스님을 지도 법사로 추대하는데 동의해 줄 것, 지부장에게 적극 협조해 줄 것 등 4가지 사항이었다.
그래서 부산지부 간부로 다시 사무장제를 신설하여 최병문 법우에게 맡겼는데 안홍준 최병문 법우가 1년간 수고한 덕택으로 부산지부는 다시 범 지부적 위치를 구축하고 활기를 되찾았다.
*1973―
제8차 동계 수련 대회
(1972. 12. 31∼1973. 1. 5)
제8차 수련대회는 영남 지방의 각 지부와 협동으로 진주 다솔사에서 개최했다. 부산지부를 비롯하여 경북지방, 경남지부 및 안동 준 지부와 합동 주최한 이유는 목적을 같이하는 우리 불교인의 보다 폭 넓은 친목도모와 다양한 내용을 위한 시도 이외에도, 단독 주최시 애로점인 지도강사, 법사님의 해결을 꾀함에 있었다.
이번 수련 대회를 부산지부 수련 대회사에 넣어 8차로 한 것은 약간의 문제점이 있긴 하나, 예전 본부 주최 수련 대회시의 단순한 참가가 아니고 부산지부가 적극 주선하고 다수 회원이 참가한 점에서 8차 수련 대회로 했다.
1972년의 한 해가 저무는 제야의 날에 부산역에서 출발하여 진주 다솔사에서 6박 6일로 개최되었는데 참가회비는 교통비를 개인부담으로 하고 1,800원이었다. 지도 교수는 건국대의 이영무 교수가 해 주셨고, 특강으로 이기영 박사, 정중환 박사, 최만술 법사 등이었다.
수련을 통하여 망각의 골짜기에 버려진 자아발견의 因을 마련하고, 참다운 구도자로서 다가오는 새해에는 보다 밝고 전진적인 해가 되길 다짐했다.
* 졸업생 환송 법회(1973. 2. 15)
「주마등처럼 명멸하는 회상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정녕 떠나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따라 가는 길이건만 이토록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어제도 오늘도 만날 수 있었던 정다운 法友들이 내일이면 좀처럼 만나기 어렵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지난날 깜깜히 나부끼는 발심(發心)의 깃대를 같이 들고 다녔던 수백명의 法友들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얼마 남지 않는 우리마저 기약없는 이별을 하고 이 풍진 사바세계를 제나름대로 가야하기 때문입니까? …… (후략) ……」
이 글은 73년 2월 15일 초량 소림사에서 있었던 졸업생 환송 법회때 현익채 법우가 눈물을 억제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읽었던 「답사」의 한 부분이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나기 어렵다. 떠나가는 것은 결코 떠나가는 것이 아니며, 가고 옴이 없는 길을 잠시 분별하고 있을지라도, 정든 부산지부를 떠나는 아쉬움은 졸업생의 가슴 가슴에 젖었고 후배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답사에서 '이 풍진 사바세계'란 말은 잠시나마 화제가 되었다. 이날 환송 법회때 시상을 받은 사람은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수 없으나 현익채, 김경환, 이종군, 송덕숙, 박정옥, 김은희 법우 등으로 기억된다.
* 법회 운영과 사무실
초량 소림사에서 법회를 보았는데 법사로는 운성 스님, 화엄 스님, 초연 스님이 얼마간 나오시다가 양국 스님이 법사로서 설법해 주셨다. 합동 법회때는 많은 회원이 참가했다. 당시 대불련 부산지부 사무실은 최병문 사무장 자택을 사용했으며 방안과 대청마루에 30∼40명씩 모여 매 주 회의를 가지며 차를 들기도 했다.
* 부산 불교 홍법회 발족
오래 전부터 부산지부 동문회 모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결성을 시도 했으나 여의치 않아 실패되었는데 1973년 초부터 본격적인 추진을 하였다.
속속히 맺힌 정, 미지의 힘에 사무쳤던 몇몇 졸업생들이 동문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이덕성, 손제석, 송용수(당시 4년생이었으나 특례를 인정), 이승립, 현익채, 김성해, 김순임, 김언자, 김옥수 법우 등이 1973년 4월 23일 모 중국 요리점에서 동문회 결성에 합의하였다. 임시 대표로 이덕성 법우를 만장일치로 추대하고 매월 셋째 토요일 소림사에서 회합하기로 결정 하고, 매월 빠짐없이 집회를 가졌다.
그 후 1년이 가깝도록 후배들과 같이 모이면서도 우리의 조촐한 모임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고, 후배 육성과 졸업생간의 친목 활동에 그쳤기 때문에 회의 명칭도 구태여 정하지 않았고 회장도 없었다.
그러다가 1974년 2월 16일 졸업생 환송 법회 때 후배들에게 조그만 표창을 할려니 이름이 필요해서 1974년 2월 2일 현익채 법우의 제의로 弘法會라 칭하고, 회장에 이승립 법우를 선출했다.
매월 회비를 받은 돈으로 절약하면서 적은 금액이나마 부산지부에 보조를 하면서 정기 집회를 매월 1회씩 가졌다. 2대 회장에 송용수 법우가 선출되자 홍법회는 금련사에서 초발심경 강의를 김덕수 법사로부터 들었다. 졸업후 2년간 거제군 장승포에 있는 해성중 고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현익채 법우가 부산의 금정중학교로 전근오자 3대 홍법회장에 선출되었다.
현익채 회장은 회원 확보를 우선 목표로 해서 회원수를 늘리고 회칙도 제정했다. 회의 정비와 구도를 도모하면서 홍법 활동에 주력하고자 하는 홍법회는 부산지부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여, 회지 발간과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10년사」편찬에 뜻을 모아 이 막중하고도 어려운 佛事를 불퇴전의 원력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제1회 연합 봉축제
불기 2517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제1회 연합 봉축제가 전회원의 땀 맺힌 노력과 정성스런 협조로 지금까지의 부산지부 행사중 최대의 행사로 개최되었다.
언제 부터인가 본회 명칭이 한국 대학생 불교 연합회 부산지부 보다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로 많이 쓰이기 시작했는데, 봉축 행사는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각 부 주최로 하고 주관은 산하 각 지회가 했는데 11개 행사 중 9행사가 실시되었다. 각 행사를 살펴보면
1) 부처님 오신날 제등 행렬
일시 : 1973년 5월 10일 PM7시
장소 : 대각사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주관 : 부산 불교 청년회
2) 군장병 위안회
일시 : 1973. 5. 10
장소 : 육군 교도소, 국군통합병원,
해안초소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여학생부
주관 : 부산 여대 불교 학생회
3) 불교 서예전
일시 : 1973. 5. 14∼17
장소 : 부산 대학교 화랑
작품 : 고 청담 스님 글 외 70점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총무부
주관 : 부산 대학교 불교 학생회
4) 불교 사상 강연회
일시 : 1973. 5. 19 PM6시
장소 : 부산 데파트 4층 강당
※소형 영화상영(거사림회 제공)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교화부
주간 : 부산 공전 불교 학생회
5) 불교 사상 강연회
일시 : 1973. 5. 19 PM3:30
장소 : 동아 대학교 강당
연사 : 혜곡용해 박사
(일본 불교대학 교수)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조직부
주관 : 동아 대학교 불교 학생회
6) 성지 순례 법회
일시 : 1973. 5. 20
장소 : 기장죽도(AM8시 30분까지 부산역 집합)
회비 : 300원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봉사부
주관 : 부산 의과 대학 불교 학생회
7) 불교 사상 강연회
일시 : 1973. 5. 26 PM3시
장소 : 부전 예식장 2층
연사 : 김종우 박사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주관 : 부산 교육 대학 불교 학생회
8) 무의촌 진료봉사 기금조달 1일 다실
일시 : 1973. 5. 27
장소 : 남포동 입구 "밀"다실
주최 : 부산 대학생 불교 연합회
주관 : 부산시 여전 불교 학생회
9) 부산시 교육감기 쟁탈 제5회 친선 체육대회
일시 : 1973. 6. 3
장소 : 해양 대학 연병장
구기종목 : 배구,축구,Foot base볼
※종합우승 - 동아대 지회
준우승 - 부산 여전
참가팀 : 각 대학 불교 학생회
주최 : 부산시 대학생 불교 연합회 체육부
주관 : 한국 해양대학 불교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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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큰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는데는 안홍준 지부장을 비롯한 전 간부들의 노고는 대단하였으며 지도위원이신 강석진 신도회장, 김석배 거사림 회장, 석암 큰스님, 송병진 변호사, 조정관 범어사 주지, 한영석 부산 선거 관리 위원회 상임위원 등의 지도 편달도 적지 않았다.
행사 경비는 신도 보조 및 스폰서로 충당되었는데 참고로 밝혀둔다.
부산 불교 신도회장 강석진 10,000
부산 불교 거사림회장
김석배,이인희 15,0000
경남 고등학교 교장 이윤근 10,000
해동 고등학교 교장 김용호 10,000
변호사 송병진 10,000
삼성 약국 오명수 50,000
성도 여관 임성덕행 10,000
고려 불교서원, 고려범종
사장 김병수 10,000
국제주유소 10,000
소림사 주지 이정일 10,000
창선 아케이트 국제사 5,000
피보 약국(부산역 앞) 10,000
고려당 표구사 대표 박용곤 3,000
부산 화랑 송순석 5,000
보원장 대표 이문자 <상당액>
부산 불교 홍법회 10,000
그 밖에 일일 다실 수입금 4만원을 합쳐 총30여만의 큰 경비로 제1회 봉축제를 성공리에 마쳤다. 봉축제 행사 안내 팜플렛은 스폰서 때문에 당일 아침에 나왔는데 팜플렛 맨 뒷면의 광고는 하나도 수입이 없었다 한다.
봉축제의 각 행사는 일일이 설명 붙이는 것을 지면 관계로 생략하나 한 두가지 에피소드를 적어본다. 제등행렬에 있어 대학생들이 대각사에서 행하는 제등행렬을 도와 주고 교통정리등에 협조해 주었으나 끝에 경비 문제로 싸움 아닌 말다툼이 있었다. 또 무의촌 진료 봉사를 위한 일일 다실을 밀 다실에서 개최했던 바 계약은 35,000원인데 그날 수입은 40,000원 이었다. 서예 전시가 곁들여 진행되었는데 국회의원 박창종씨 비서가 찬조금을 주기도 했다. 1일 다실이 끝나 오후 늦게 서예품을 대신동 박만탁씨 집에 갔다 주고 나오니 12시 5분 전이었다.
최병문 법우는 걸어오다가 대청 파출소에 야통 위반으로 걸려 즉결 넘어가기 직전 익일 아침 8시에 풀려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영도지부 원불교 청년회와 좌담회를 개최코자 했으나……
부산지부가 원불교 영도지부와 좌담회를 개최키로 하고 약속대로 안홍준 지부장 등 10여명이 원불교 영도지부에 갔으나, 시작은 7시인데 도착한 시각은 6시 30분이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약속을 어기고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아 부산지부 회원은 그냥 돌아왔다.
그때 원불교에 기증하려고 가지고 갔던 거울은 현재 최병문 법우 집에 보관중이다.
* 만해 한용운 전집 보급 활동
민족 독립 운동가요 위대한 시인이며 불교계 지도자였던 님의 묘소가 망우리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버려져 있는 것을 본 한국대학생 불교 연합회는 만해 동산 건립과 묘지 이전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만해 한용운 전집 보급 활동을 1973년 6월 15일 부터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부산지부는 이 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여름 방학 중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안홍준 지부장과 최병문 사무장을 비록한 간부들이 관공서나 사찰로 책 보급에 나섰다. 사찰을 방문 할때는 범어사 주지의 위임장을 가지고 갔으며, 대각사에는 주지스님과 말타툼이 있기도 했다.
간부들의 노력으로 100여질 팔았으니 그 성과는 서울지부를 빼면 타 지부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이다.
*산악부 발족
부산지부에는 회원끼리 불교적 모임외에도 산악부 같은 써클이 최병문 사무장의 주곤아래 발족되어 회원들의 심신단련과 유대강화를 꾀했다. 73년 9월 둘째 화요일에는 김해 신어산과 무척산에 등산을 갔는데 최병문, 정순화, 김정희 법우 등 많은 사람이 참가했다.
*지회 활동 강화
부산 지부 하기 수련대회는 안하는 대신 각 지회별로 수련대회, 봉사 활동이 많았다. 부산대가 73년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순천 송광사에서 수련대회를 했고, 동아대 지회도 표충사에서 하계 수련대회를 개최했다. 부산의대 지회는 7월 27일부터 의료 봉사를 했고, 교대 지회도 7월 22일부터 27일까지 봉사 활동을 했다. 또한 부산 공전 지회도 성불사에서 8월 8일부터 13일까지 하계수련대회를 가져 지회 활동이 강화되었다.
댓글목록
이영호님의 댓글
이영호 작성일
안홍준선배님, 항상넉넉한 마음 지금도 그대로....존경합니다.
이러한 글들을 올려주는 인연 공덕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