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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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태진 작성일2006.11.09 조회3,527회 댓글4건본문
불교여성개발원에서 나오는 <우바이>라는 회보에
원고청탁을 받았습니다.
망설이다가, 부끄러운 고백을 본의 아니게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
강 태 진 <불교TV 보도부장>
우리 어머니는 1950년 6.25전쟁이 나던 해 중학교를 졸업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학제는 고등중학교라 해서 5년제 이니까, 지금의 고등학교와 같다는 것은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매년 신학기에 학생들 눈을 감기고(실제로는 모두 실눈을 뜨고 있었는데...) 실시하는 ‘가정환경조사’에 어머니는 늘 ‘중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25가 나자 1남2녀의 맏딸인 어머니는 신병으로 친정인 경기도 양주군 교현리에 피접을 가 계시던 외할머니를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가보니 모두 피난을 가고 외할머니만 자리에 누워 계셨고, 그 때부터 어머니의 병간호는 시작됐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54년의 어느 날 아침, 자리에 누워 계시던 외할머니가 갑자기 “어젯밤 꿈에 오봉산 석굴암 부처님이 나를 부르신다”며 벌떡 일어나 그 길로 십리 떨어진 오봉산 석굴암에 걸어 들어 가셨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도 함께 가보니 전쟁으로 폐사가 된 석굴 안에 움막을 짓고 웬 젊은 스님(지금은 입적하신 회주 초안 큰스님, 고향이 휴전선 이북이라 어머니를 모시고 월남하셨음)과 그 스님의 속가 어머니께서 석굴암 중창을 발원하는 천일기도를 드리고 계셨고, 그 길로 세 분은 40여년간 뼈를 깎는 중창불사에 들어가셨습니다.
몸져 누워계시던 외할머니께서 10리길 20리길을 마다 않고 시주미를 다섯 말씩이나 이고 져 나르셨고, 외할머니가 현몽을 하고 병환이 낳았다는 영험이 널리 퍼져 신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처럼 석굴암 중창불사의 대화주 보살이 되신 외할머니는 당신이 물려받은 가산을 모두 불사에 시주하신 것은 물론 40여년을 한결같이 내핍과 근면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의 헌신적인 봉사로 어려운 절살림을 도맡아 오시다 팔순이 넘어 입적하신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해마다 건축불사가 끊이지 않는 와중에서도 외할머니는 부모와 갈 곳이 없는 어린아이들을 무려 11명이나 키우셨고, 그 중 마지막으로 9살 때 입산해 큰 서원을 세우고 유일하게 회주 큰스님의 상좌로 출가한 분이 현재의 주지 도일스님 이십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저와 도일스님은 생일이 하루 차이인 동갑내기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저와 제 동생은 방학 때면 홀몸으로 직장을 다니시며 우리들을 키우시는 어머니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 석굴암에서 지냈고, 자연스럽게 불법의 인연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큰스님은 말씀은 한 번도 안 하셨지만, 제가 출가해 법맥과 불사를 잇기를 바라셨고, 저 스스로도 발심한 바가 있어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연이 거기까지인지, 근기가 부족한 탓인지 결국 산문에 들어가지 못한 채 여전히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지 도일스님은 출가 후 정말 모질게도 엄격하신 회주 큰스님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모셨습니다. 해인사 강원에 보내주십사 하는 도일스님의 간청에 큰스님은 “나쁜 중물이 들어서 안된다”면서, 단호하게 불허하셨고, 도일스님은 ‘목숨 건 단식(?)’ 끝에 간신히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스님은 도일스님이 강원을 졸업하시던 날에는 신도들과 함께 해인사까지 찾아가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하셨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따뜻한 격려 한마디 해 주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도일스님은 회주 큰스님이 입적하신 후 7년 동안 은사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중창불사를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굳은 서원을 하시고, 2번의 천일기도 동안 일체 산문 밖을 나가지 않고 정진하셨습니다. 그같은 주지스님과 신도들의 간절한 원력에 힘입어 152평을 제외한 모든 사찰부지를 소유하고 있던 기독교 재단으로부터 2만평을 매입하는 토지불사를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일스님은 신도들 뿐 아니라 문중 스님들로부터 한결같이 “요즘 저렇게 효성이 지극하고 순수한 스님이 안 계시다” "큰스님이 (유일한)상좌농사는 정말 잘 지으셨다”는 칭송을 듣고 계시니, 기쁘기도 하지만 마음 한편 큰스님께 죄스러운 마음 지울 길이 없습니다.
다시 어머니 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6.25때 외할머니 병간호를 얻은 신병에 대해 당신의 시신을 기증해서라도 더 이상 고생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생명나눔 실천본부에 모시고 가 저도 함께 장기 및 시신기증을 했습니다.
이후 10년 가깝게 열심히 생명나눔 본부의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계시고, 며칠 전에는 재단 행사에서 봉사상을 받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 어머니는 다른 복지관에 봉사활동을 마치고 가느라 늦게 도착하셨고, 저는 방송국 일 때문에 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 외할머니! 큰스님! 죄송합니다!
원고청탁을 받았습니다.
망설이다가, 부끄러운 고백을 본의 아니게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
강 태 진 <불교TV 보도부장>
우리 어머니는 1950년 6.25전쟁이 나던 해 중학교를 졸업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학제는 고등중학교라 해서 5년제 이니까, 지금의 고등학교와 같다는 것은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매년 신학기에 학생들 눈을 감기고(실제로는 모두 실눈을 뜨고 있었는데...) 실시하는 ‘가정환경조사’에 어머니는 늘 ‘중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25가 나자 1남2녀의 맏딸인 어머니는 신병으로 친정인 경기도 양주군 교현리에 피접을 가 계시던 외할머니를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가보니 모두 피난을 가고 외할머니만 자리에 누워 계셨고, 그 때부터 어머니의 병간호는 시작됐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54년의 어느 날 아침, 자리에 누워 계시던 외할머니가 갑자기 “어젯밤 꿈에 오봉산 석굴암 부처님이 나를 부르신다”며 벌떡 일어나 그 길로 십리 떨어진 오봉산 석굴암에 걸어 들어 가셨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도 함께 가보니 전쟁으로 폐사가 된 석굴 안에 움막을 짓고 웬 젊은 스님(지금은 입적하신 회주 초안 큰스님, 고향이 휴전선 이북이라 어머니를 모시고 월남하셨음)과 그 스님의 속가 어머니께서 석굴암 중창을 발원하는 천일기도를 드리고 계셨고, 그 길로 세 분은 40여년간 뼈를 깎는 중창불사에 들어가셨습니다.
몸져 누워계시던 외할머니께서 10리길 20리길을 마다 않고 시주미를 다섯 말씩이나 이고 져 나르셨고, 외할머니가 현몽을 하고 병환이 낳았다는 영험이 널리 퍼져 신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처럼 석굴암 중창불사의 대화주 보살이 되신 외할머니는 당신이 물려받은 가산을 모두 불사에 시주하신 것은 물론 40여년을 한결같이 내핍과 근면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의 헌신적인 봉사로 어려운 절살림을 도맡아 오시다 팔순이 넘어 입적하신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해마다 건축불사가 끊이지 않는 와중에서도 외할머니는 부모와 갈 곳이 없는 어린아이들을 무려 11명이나 키우셨고, 그 중 마지막으로 9살 때 입산해 큰 서원을 세우고 유일하게 회주 큰스님의 상좌로 출가한 분이 현재의 주지 도일스님 이십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저와 도일스님은 생일이 하루 차이인 동갑내기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저와 제 동생은 방학 때면 홀몸으로 직장을 다니시며 우리들을 키우시는 어머니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 석굴암에서 지냈고, 자연스럽게 불법의 인연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큰스님은 말씀은 한 번도 안 하셨지만, 제가 출가해 법맥과 불사를 잇기를 바라셨고, 저 스스로도 발심한 바가 있어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연이 거기까지인지, 근기가 부족한 탓인지 결국 산문에 들어가지 못한 채 여전히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지 도일스님은 출가 후 정말 모질게도 엄격하신 회주 큰스님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모셨습니다. 해인사 강원에 보내주십사 하는 도일스님의 간청에 큰스님은 “나쁜 중물이 들어서 안된다”면서, 단호하게 불허하셨고, 도일스님은 ‘목숨 건 단식(?)’ 끝에 간신히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스님은 도일스님이 강원을 졸업하시던 날에는 신도들과 함께 해인사까지 찾아가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하셨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따뜻한 격려 한마디 해 주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도일스님은 회주 큰스님이 입적하신 후 7년 동안 은사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중창불사를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굳은 서원을 하시고, 2번의 천일기도 동안 일체 산문 밖을 나가지 않고 정진하셨습니다. 그같은 주지스님과 신도들의 간절한 원력에 힘입어 152평을 제외한 모든 사찰부지를 소유하고 있던 기독교 재단으로부터 2만평을 매입하는 토지불사를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일스님은 신도들 뿐 아니라 문중 스님들로부터 한결같이 “요즘 저렇게 효성이 지극하고 순수한 스님이 안 계시다” "큰스님이 (유일한)상좌농사는 정말 잘 지으셨다”는 칭송을 듣고 계시니, 기쁘기도 하지만 마음 한편 큰스님께 죄스러운 마음 지울 길이 없습니다.
다시 어머니 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6.25때 외할머니 병간호를 얻은 신병에 대해 당신의 시신을 기증해서라도 더 이상 고생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생명나눔 실천본부에 모시고 가 저도 함께 장기 및 시신기증을 했습니다.
이후 10년 가깝게 열심히 생명나눔 본부의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계시고, 며칠 전에는 재단 행사에서 봉사상을 받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 어머니는 다른 복지관에 봉사활동을 마치고 가느라 늦게 도착하셨고, 저는 방송국 일 때문에 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 외할머니! 큰스님! 죄송합니다!
댓글목록
손권찬님의 댓글
손권찬 작성일잘 읽고 갑니다.어머님께 효도 많이 하세요.
효당님의 댓글
효당 작성일선배님... 인연이 깊으셨네요...
홍경희님의 댓글
홍경희 작성일아니~ 효당이?...잊아뿐 줄알았는디?
성기태님의 댓글
성기태 작성일우리들 어머니을 부처님처럼 모셔야 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