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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성학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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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항원 작성일2009.03.02 조회3,7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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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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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ODY>
<TR vAlign=top>
<TD id=user_contents style="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WIDTH: 100%; PADDING-TOP: 10px" name="user_contents">
<P align=left><STRONG><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성학십도(聖學十圖)</SPAN></SPAN></STRONG><BR>
<P align=left><STRONG><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SPAN></SPAN></STRONG><BR> 
<P align=left><STRONG><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1. 태극도 -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라 </SPAN></SPAN><BR><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2. 서명도 - 천지 만물과 하나가 되어라 </SPAN></SPAN><BR><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3. 소학도 - 일상적인 일에 충실하라 </SPAN></SPAN><BR><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4. 대학도 - 수신으로부터 시작하라 </SPAN></SPAN><BR><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5. 백록동규도 - 인간이 되는 학문을 하라 </SPAN></SPAN><BR><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6. 심통성정도 - 마음을 바르게 해라 </SPAN></SPAN><BR><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7. 인설도 - 인을 본체로 삼아라 </SPAN></SPAN><BR><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8. 심학도 - 잃어버린 본심을 찾아라 </SPAN></SPAN><BR><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9. 경재잠도 - 경의 세부 사항을 실천하라 </SPAN></SPAN><BR><SPAN style="FONT-FAMILY: Gungsuh"><SPAN style="FONT-SIZE: 14pt">10. 숙흥야매잠도 -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하라 </SPAN></SPAN></STRONG><BR><BR><BR>
<P align=left>성인이 되기 위한 열 가지 그림, 성학십도 <BR>퇴계 이황 연보 <BR>
<P align=left>조선 중기의 유학자 이황(李滉)이 선조 1년(1568) 12월에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68세의 노대신(老大臣)이 즉위 원년에 경연(經筵)에 입시하였을 때 올린 글이다.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군왕의 도(道)에 관한 학문의 요점을 도식으로 설명하였다. 성학이라는 말은 유학을 가리키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을 가진다. 《성학십도》는 서론의 내용이 담긴 <진성학십도차>와 10개의 도표와 해설로 되어 있다. <진성학십도차>에서는 왕 한사람의 마음의 징조가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경(敬)의 내면화를 중요시한다. 십도(十圖)란 태극도(太極圖)·서명도(西銘圖)·소학도(小學圖)·대학도(大學圖)·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인설도(仁說圖)·심학도(心學圖)·경재잠도(敬齋箴圖)·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의 10가지이다. 도표 가운데 5개는 천도에 근원하여 성학을 설명한 것이고 나머지 5개는 심성에 근원하여 성학을 설명한다. 7개는 옛 현인들이 작성한 것이고, 3개는 이황 자신이 작성하였다. 십도의 내용서술은 도표와 함께 앞부분에 경서(經書)와 주희(朱熹) 및 여러 성현의 글을 인용한 다음 자신의 학설을 전개하고 있다.<BR>
<P align=left><BR> 
<P align=left><STRONG>성학십도를 올리는 차(箚-간단한 상소문)와 도(圖)</STRONG><BR><STRONG>
<P align=left><BR></STRONG> <BR><STRONG>판중추부사</STRONG>((判中樞府事) 신(臣) 이황(李滉)은 삼가 재배(再拜)하고 아룁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도는 형상이 없고 하늘은 말이 없습니다. 하도낙서(河圖洛書)가 나옴에, 성인이 이것을 근거로 괘효(卦爻)를 지은 뒤로부터 도가 비로소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도는 넓고 넓으니 어디서부터 착수하여야 하며, 옛 교훈(古訓)은 천만 가지나 되니 어디서부터 따라 들어가야 하겠습니까?<BR>성학에는 큰 실마리가 있고, 심법에는 지극한 요령이 있습니다. 이것을 드러내어 도(圖)를 만들고, 이것을 지적하여 설(說)을 만들어, 사람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入道之文)과 "덕을 쌓는 기틀(積德之基)"을 보여 주는 것은 역시 후현(後賢)들이 부득이하여 하는 것입니다.<BR>더욱이 임금된 분의 한 마음(一心)은 온갖 정무(萬幾)가 나오게 되는 자리이며 온갖 책임(百責)이 모이는 곳이며 뭇 욕심이 갈마들며 침공하고, 뭇 간사함이 갈마들며 침해하는 곳입니다. 그 마음이 만일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지면서 방종하여 간다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과 같아서, 그 누구도 이것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BR><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옛날의</STRONG> 성스럽고 현명한 황제(聖帝)나 군왕(明王)은 이러한 점을 걱정하여,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로 하루하루를 삼가 지내면서도 오히려 미흡하다고 여긴 나머지, 스승이 되는 관원(師傳之官)을 세우는 한편 바른 말을 간하는 직책을 두었고, 전후좌우에 의승(疑丞) 보필(補弼)이 있게 하였습니다. 수레를 탈 때는 여분(旅賁)의 규(規)가 있었고, 조회 때에는 관사(官師)의 법이 있었으며, 안석에는 훈송(訓誦)의 간(諫)이 있었습니다. 침실에는 근시(近侍)의 잠언(箴言)이 있었고, 일을 처리할 때는 고사의 인도함이 있었으며, 한가로이 있을 때는 공사(工師)의 송(誦)이 있었습니다. 소반이라든가 밥그룻, 책상, 지팡이, 칼, 들창문에 이르기까지 무릇 눈길이 닿는 곳과 몸이 처하는 곳에는 어디나 명(銘)과 계'(戒)가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 마음을 유지하고 몸을 방범(防範)하게끔 하는 것이 이토록 지극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덕이 날로 새롭고 업(業)이 날로 번창하여, 티끌만한 허물도 없게 되고, 나아가 큰 이름이 남게 되었습니다.<BR><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후세의</STRONG> 군주들이란 하늘의 명을 받고 왕위에 오른 만큼 그 책임이 지극히 크고 무겁건만 어떻게 되어서인지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닦게끔 하는 것은 하나도 이 같이 엄정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면서도 불손한 태도로 스스로 성자인 체 하는가 하면 오만한 태도로 왕공과 수많은 백성들의 위에서 방자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결국 괴멸하게 되는 것이야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남의 신하가 되어 임금을 도에 합당하도록 인도하려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그 마음을 여러 모로 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장구령(長九齡)이 [금감록](金鑑錄)을 올린 것과 송경(宋璟)이 [무일도](無逸圖)를 드린 것과 이덕유(李德裕)가 [단의육잠]을 바친 것, 진덕수(眞德秀)가 [빈풍칠월도]를 올린 것 등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금심하여 마지않는 갖은 충정과 선을 베풀고 가르침을 드리는 간곡한 뜻이므로, 임금이 마음에 깊이 새겨 경복(敬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BR><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신은</STRONG>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추한 몸으로 여러 대의 임금님께 받은 은혜를 저버린 채, 병든 몸으로 농촌에 틀어박혀 초목과 함께 썩어 가길 기약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헛된 이름이 잘못 전하여져 강연(講筵)의 중임(重任)을 주어 부르시니 떨리고 황송하옵니다. 사양하고 피할 길이 없는데다 이미 이 자리를 면하지 못하고 욕되게 한 이상, 성학을 권도(權導)하고 신덕(宸德)을 보양하여 요순 시대의 융성을 이룩하려는 일만은 비록 사양하려 하여도 할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신은 학술이 거칠고 성기며 언변이 서투른데다 질병까지 잇달아 시강(入侍)조차 드물게 하였는데, 겨울철 이후로는 그것마저 완전히 그만두었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걱정스럽고 두려운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BR><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신이</STRONG> 엎드려 생각하여 보니, 처음에 글을 올려 학문을 논한 것들이 이미 전하의 뜻을 감동 분발시킬수 없었으며, 나중에 직접 대하여 여러차례 아뢴 말씀 또한 전하의 슬기에 도움을 드릴 수 없었으므로, 보잘 것 없는 신의 정성으로는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옛 현인과 군자들이 "성학'을 밝히고 "심법"을 파악하여 "도"와 "설"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문(入道之門)"과 "덕을 쌓는 기초(積德之基)"를 보여주는 것이 마치 해와 별같이 밝게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으므로, 이에 감히 이것들을 가지고 나아가 아룀으로써 옛 대왕들의 공송(工誦)과 기명(器銘)이 남긴 뜻에 대신하고자 하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마도 과거를 본받아 장래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하옵니다. <BR><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이에 </STRONG>옛것 중에서 삼가 더욱더 두드러진 것을 가려 뽑은 것이 일곱 가지 도(圖)입니다. 그 중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는 "정씨도"를 토대로 신이 만든 두 가지 작은 도(小圖)를 덧붙인 것입니다. 그밖에 세 개의 도는 비록 신이 만들었지만, 그 글(文)과 뜻(志)의 조목과 규획은 한결 같이 옛 성현들께서 한 것이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을 합하여 [성학십도](聖學十圖)로 만들었는데, 각 그림 밑에는 외람되나마 저의 설을 붙여 보았습니다. 삼가 정서하여 사람 편에 올리옵니다.<BR><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하온대</STRONG> 신이 추위와 질병에 묶인 채 몸소 이것을 하려 하니 눈이 어둡고 손이 떨려 글씨가 단정하지 못하며 글의 줄과 글 크기가 모두 규격에 맞지 않습니다. 다행히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이것을 경연관(經筵官)에게 내리시어 바로잡을 논의를 더 많이 하게 하는 동시에 틀린 곳을 고치고 보충하게 하신 다음,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정본(正本)을 정사(精寫)토록 하시기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그 정본을 해당관서에 의뢰하여 병풍 한 벌을 만드셔서 평소 한가롭게 지내시는 곳에 펼쳐 두시도록 하거나 또는 따로 조그마한 수첩을 하나 만들어 항상 궤안에 놓아 두고 기거 동작하실 때 언제나 보고 살피셔서 경계하신다면 충성을 바치려 하는 신의 뜻은 다행스럽기 이를 데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 뜻 중에 다 드러내지 못한 것을 신이 지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BR><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일찍이</STRONG> 듣건데 맹자는 "마음의 기능(心官)은 생각(思)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이해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을 위하여 [홍범](洪範)을 진술할 때에도, "생각하는 것을 예(睿)라 하는데, 예는 성인을 이룩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마음이란 방촌(方寸)에 있는데 지극히 허(虛)하고 영(靈)한 것입니다. 이(理)야말로, 도서(圖書)에 드러나 있지만, 지극히 허령한 마음으로 지극히 확실하고 알찬 이(理)를 구하면 틀림없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면 이해되고", "예(睿)가 성인을 이룩한다"는 것이 어찌 오늘날이라 하여 증명될 수 없겠습니까?<BR><BR>
<P align=left>그러나 영묘한 마음이라 해도 만일 마음의 주재하는 능력이 없으면 일을 앞에 당하여 놓고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이(理)의 드러남이 확실하더라도 만일 찾아서 처리하려는 생각이 없으면, 항상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또한 도해를 토대로 생각하는 것도 소홀히 하여서는 아니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BR><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또한</STRONG> 듣건대,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두워지고, 생각만 하면서 배우지 않는다면 위태로워진다"고 하였습니다. 배움(學)이란 그 일들을 익혀(習事) 참되게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큰 학문(聖門之學)이란 마음을 떠나서는 얻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생각하여 그 미묘한 점에까지 통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고서도 그 일을 익히지 않으면 위태로워 불안하므로 반드시 배워가지고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생각(思)과 배움(學)은 서로 계발(相發)하고 서로 도움(相益)을 주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이치를 깊이 살피시고, 모름지기 먼저 뜻(志)을 세워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我)는 어떤 사람인가, 노력이 순과 같이 되게 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분발하여 생각과 배움의 두 가지 공부에 힘을 쓰셔야겠습니다. 그런데 "지경"(持敬), 즉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란 곧 생각과 배움을 겸하고 동과 정을 일관하고 안(마음)과 밖(행동)을 합치시키고, 드러난 것(顯)과 숨겨진 것(微)을 한 가지 되게 하는 도리입니다.<BR><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경의</STRONG> 태도를 유지하는 방법은 반드시 이 마음을 제장정일(齊莊靜一)한 속에서 보존하고, 이에 대한 이치를 학문사변(學問思辨)하는 사이에 궁리하며, 남이 보지도 듣지도 않는 곳에서 "계구", 즉 자신을 경계하며 두려워하는 것을 더욱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하며, 혼자만 있는 은밀한 곳(隱微幽獨之處)에서는 "성찰", 즉 자신을 되돌아보고 살피는 일을 더욱더 정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도해(圖)에 입각하여 생각할 때에는 그 도해에만 집중적으로 전념하여 마치 다른 도해가 있다는 것은 모르는 듯이 하여야 하며, 어느 한 일을 익힐 때는 그 일에만 전념하여 마치 다른 일이 있는 것은 모르는 듯이 해야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변함없이 그렇게 하여야 하고 오늘과 내일 매일매일 계속하여야 합니다. 혹은 새벽녘 정신이 맑을 때(夜氣淸明時)에 되풀이하여 그 뜻을 음미하여 보기도 하고, 혹은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과 응대할 경우에도 그것들을 경험하면서 키워가셔야 하겠습니다.  <BR><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그렇게 </STRONG>하시면 처음에는 혹 부자유스럽고 모순되는 난점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거나, 때로는 극히 고통스럽고 불쾌한 일들도 ?平? 않겠으나, 이러한 것은 바로 옛 사람들의 이른바 "장차 크게 나아갈 기미(大進之幾)"이며 또한 "좋은 소식의 징조(好消息之端)"이니, 절대로 이로 인하여 그만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더욱더 자신을 가지고 힘을 기울이게 되면, 자연히 마음과 이(理)가 서로 영향을 미쳐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을 환히 꿰뚫 듯 이해하게 되고, 익히는 것(習)과 그 익혀진 일이 서로 익숙하여져서 점차로 순탄하고 순조롭게 행하여지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각각 그 한가지에만 전념하던 것이 끝내는  모두 일치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맹자가 말한 " 학문을 깊이 파고들어 스스로(자기에게) 깨닫는 경지(深造自得之境)"이며,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만두지 못할 경험입니다. 또 이에 따라서 부지런히 힘써 나의 재능(吾才)을 다하면 안자(顔子)의 인을 어기지 않는 마음과 나라를 위하는 사업(爲邦之業)이 다 그 속에 있게 될 것이며, 증자(曾子)의 일관된 충서(忠恕)와 전도의 책임이 그 몸 자신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BR><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외경</STRONG>(畏敬)"의 태도가 일상생활 중에서 떠나지 않으면 "중화(中和)"에 의한 만물의 "위육(位育)"의 공(功)을 이룩할 수 있으며, "덕행"이 이륜(人倫)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천인 합일"의 묘한 경지도 마침내 이룰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도라 하여 만들고 설이라 하여 지은 것이 겨우 열폭의 종이에 늘어놓은 데 불과하며, 생각하시고 익히시는 것이 단지 평소 한가로운 곳(燕處)에서 하는 공부에 지나지 않지만 도(道)를 깨달아 성인을 이루는 요체와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베푸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오직 전하께서 이에 시종 유의하시어 하찮다고 소홀히 하신다거나 귀찮고 번거롭다고 치워 버리지 않으신다면, 나라(宗社)의 다행이며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신이 초야에 묻힌 야인으로서 근폭(芹曝)을 올리는 정성으로 전하의 위엄을 모독하는 것임을 무릅쓰고 바치나이다. 황송하옵고 송구하올 뿐입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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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제일 태극도 (第一 太極圖) </STRONG><BR><STRONG></STRONG> <BR><STRONG></STRONG><IMG style="CURSOR: pointer" onclick=imgSize_OPEN(this.src) src="http://iktc.org/tech_iktc/data/board/ccsr/file_in_body/1/1c5c2b1d81.gif" border=0>  <BR>
<P align=left><STRONG><BR clear=all></STRONG><BR> 
<P align=left><STRONG>태극도설 (太極圖說)<BR></STRONG>태극도설 설명<BR>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BR>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는데, 동의 상태가 지극하면 정(靜)하여지고,정하여지면 "음(陰)" 을 낳는다.<BR>정의 상태가 지극하면 다시 동하게 된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하는 것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 가 맞선다. <BR>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를 낳는데, 이 다섯 가지 기(五氣)가 순차로 퍼지어 네 계절(四時)이 돌아가게 된다.<BR>"오행" 은 하나의 "음양" 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 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 이다.<BR>오행의 생성시에 각각 그 성(性)을 하나씩 가져서, "무극의 진(眞)과 이(二), 오(五)의 정(精)"이 묘하게 합하여 응결되면 "건도(乾道)"는 남성을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을 이룬다. 두 가지 기(二氣)가 서로 감화하여 만물을 낳고, 만물이 계속 생성함으로써 "변화"가 무궁하게 된다.<BR>오직 인간만이 그 빼어난 것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 형체(形)가 이미 생기자 정신(神)이 지(知)를 발하고, 오성(五性)이 감동하매 "선악"이  나뉘고 "만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BR><BR>
<P align=left>이에 성인이 "중정(中正)"과 "인의(人義)"로써 이것을 정하고, 정을 주로 하여 "인극(人極)"을 세웠다. 그러한 까닭에 "성인(聖人)"은 그 덕성이 천지와 합치하고, 그 밝음이 일월과 합치하며, 그 질서가 네 계절과 합치하고, 그 길흉이 귀신과 합치한다. 군자는 이것을 닦으므로 길하게 되고, 소인은 이것을 어기므로 흉하게 된다.<BR>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의 도를 세워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워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를 세워 인과 의라 한다"고 하며, 또 이르기를 "원시반종(原始反終)하면 사생(死生)의 설(說)을 안다"고 한 것이니, 위대하도다 '역(易)'이여! 이것이야말로 그 지극한 것이로다.  주자가 말했습니다. 도설(圖說)의 머리 부분에서는 음양에 의한 변화의 근원을 말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곧  인간의 타고난 것을 밝혔다. 여기 "오직 인간만이 그 빼어난 것을 얻어서 가장 영특하다" 한 것은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성(性)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태극이다.  <BR>"형체가 생기자 정신이 발하였다"는 것은 음이 동하고 음이 정하여 이루는 것이다.  <BR>"다섯 가지 성(五性)이 감동한다" 함은 양과 음이 변하고 합하여 수, 화, 목, 금, 토의 성을 낳는 것을 말한다. <BR>"선악이 나누인다"는 것은 만물이 화생하는 상(象)이다. <BR><BR>
<P align=left>"성인이 중정(中正), 인의(仁義)로 정(靜)하고, 정을 주로 하여 인극(人極)을 세웠다" 한 것에 이르러서는, 태극의 전체를 얻어서 천지와 더불어 간격없게 합치토록 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아래 글에서 다시 천지, 일월, 사시, 귀신이라는 네 가지와 합치되지 않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BR>주자는 또 말하였다. 성인은 힘써 닦지 않아도 저절로 된다.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여 몸을 닦는 것은 곧 군자가 길하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 도리를 거스르는 것은 소인이 흉하게 되는 까닭이다. <BR>닦는 것과 거스르는 것은 역시 "경(敬)"과 "사(肆)"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경의 태도를 가지면 욕심이 적어지고 사리는 밝아진다. 욕심을 적게 하고 또 적게 하여 아예 없게 하면, 정할 때에는 허하고 동할 때에는 곧게 나아가게 되어 성인을 배울 수 있다. <BR><BR>
<P align=left><BR> 
<P align=left><STRONG>퇴계선생 말씀<BR></STRONG>위의 것은 염계 주자가 스스로 만든 '도'와 '설'입니다.  평암(平巖)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이 그림은 [계사(繫辭)]에서 '역(易)에 태극이 있었다.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았다'고 한 뜻을 미루어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역]에서는 괘효(卦爻)를 가지고 말하였는데, 이 그림에서는 조화(造化)를 가지고 말하였습니다.<BR>주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도리의 큰 두뇌가 되는 것이며 백세 도술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이 그림을 머리에 내세우는 것은 역시 [근사록(近思錄)]에서 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첫머리에 둔 의도와 같은 것입니다. <BR>무릇 성인을 배우는 사람은 근본을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아 [소학], [대학] 등에 힘을 기울이다가 그 보람을 거두는 때에 이르러 하나의 근원을 끝가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것이 이른바 "이(理)를 궁구하고 성(性)을 다하여 명(命)에 이른다"는 것이고, 이른바 "신묘(神)를 다하고 조화를 알아서 덕이 성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BR>
<P align=left><BR><STRONG></STRONG> <BR>
<P align=left><STRONG></STRONG><BR> 
<P align=left><STRONG> 제이 서명도 (第二 西銘圖)  </STRONG><BR><BR>
<P align=left><IMG style="CURSOR: pointer" onclick=imgSize_OPEN(this.src) src="http://iktc.org/tech_iktc/data/board/ccsr/file_in_body/1/2bcadb8ed1.gif" border=0> <BR> 
<P align=left><BR><BR clear=all> <BR>
<P align=left><STRONG>서명 (西銘)</STRONG> ; 西 ; 서녁 서, 銘 ; 새길 명, 마음에 깊이 새김,<BR>서명 설명 ; 건(乾)을 부(父)라 하며, 곤(坤)을 모(母)라 한다. <BR>나는 매우 작은 존재로서, 혼연히 그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지사이에 들어찬 것은 나의 몸이며, 천지를 이끄는 원리는 나의 본서이다. <BR>모든 사람들이 다 나의 동포이며, 모든 사물이 나와 같은 족속이다. 임금은 내 부모의 종자(宗子)이며, 대신은 그 종자의 가상(家相)이다.<BR>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는 것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근본이며, 외롭고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 어린이를 어린이로 보살피는 근본이다. <BR>성인이란 그 덕이 천지와 더불어 합치되는 사람이며, 현인이란 빼어난 사람이다.<BR>무릇 천하의 늙어 허약한 사람이라든가, 병들어 고통을 받는 사람이라든가, 형제가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홀아비나 과부와 같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다 나의 형제가 심히 곤란한 처지를  당하고서도 호소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다.<BR>때로 하늘의 뜻을 보존하는 것이 내가 천지의 아들로서 천지를 공경하는 것이며, 일상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는 것이 효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천명을 어기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하고, 인을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악한 일을 더하는 자는 부재(不才)이고, 천지로부터 받은 천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오로지 부모를 닮는 자이다.<BR>천지의 조화를 알면 그 천지 부모의 사업을 잘 계속하며, 그 조화 속의 신묘함을 다 궁구하면 그 천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방 구석에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며,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데 게으르지 않음이다.  맛 좋은 술을 싫어하는 것은 우가 어버이를 돌보는 것이며, 영재를 기르는 것은 영<BR>봉인이 그 효자의 동류를 길이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BR>고생되어도 효성의 마음을 게을리하지  않아 마침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순의 공이며, 도망할 곳 없는 듯이 죽이기를 기다리는 것은 신생의 공경함이다. 주신 몸을 온전하게 가지고 살다가 돌아간 사람은 증삼이며, 따르는 데 용감하여 명령에 순종하기로 손꼽힐 사람은 백기이 다.<BR>부귀와 복택은 장차 나의 삶을 두텁게 할 것이며, 빈천과 우척(優戚)은 너를 옥성(玉成)시키는 것이다. 살아서는 천지와 부모를 순하게 섬기다가 죽게 되면 나는 편안히 돌아갈 것이다. <BR>주자가 말했다.  "[서명]이란 정자에 의하면 하나의 이가 다양하게 나누어짐을 밝힌 것이다. 대체로 건으로 아비를 삼고, 곤 즉 땅으로 어미를 삼는 것은 생물이라면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이가 하나"라는 것이다. <BR>그러나 인간 및 동물 등 혈맥을 가진 생명체의 무리들은 각각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고 그 자식을 자식으로 키우고 있으므로, 그 분별됨에 있어서는 어찌 서로 다르지 않겠는가! 하나로 통일되면서도 만 가지로 각기 다른 까닭에, 비록 천하가 한 집안이고 중국이 한 사람과 같다고 하더라도 겸애의 패단에 흐르지 않는 것이다. <BR>만 가지로 각기 다르면서도 또한 하나로 관통되므로, 비록 친하고 소원한 정의 차이가 있고 귀하고 천한 등차가 있다 하더라도 "위아"의 사사로움에 막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서명]의 대의이다. <BR>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씨를 미루어 무아의 공덕을 기르고,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을 바탕으로 하늘 섬기는 길을 밝힌 것을 본다면, 무룻 어디를 가든지 이른바 "분계에 서서 이가 하나임을 미루는 것"이 아님이 없다" 했으며, 또 주자는 말하기를 "[서명]의 앞부분은 바둑판과 같고, 뒷부분은 그 판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BR>"[서명]은 하나인 이가 다양하게 나뉘는 것을 말한 내용의 것이다. 그 이가 하나임을 아는 것은 "인"을 실행하게 하는 까닭이며, 그 이가 다르게 나뉨을 아는 것은 "의"를 행하게 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마치 맹자가 "어버이를 사랑한 다음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남들을 사랑한 다음에 사물을 사랑한다"고 한 것과 같다. 그 분수가 같지 않기 때문에, "내가 베푸는 것에도 차등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 쌍봉요시는  "[서명]의 앞 일절은 사람이 천지의 아들임을 밝힌 것이며, 뒤 일절은 사람이 천지<BR>를 섬기는 것을 마치 자식이 부모 섬기듯 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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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퇴계선생 말씀<BR></STRONG>위의 명은 횡거 장자가 지은 것입니다. 처음에 "정완"이라 이름하였는데, 정자가 이름을 바꿔 [서명]이라 하였고, 거기에 임은 정씨가 이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성학의 목적은 "인"을 찾는 데 있습니다. 모름지기 인의 뜻을 깊이 체득해야만 바야흐로 내가 천지 만물과 한 몸임을 알 수 있습니다.<BR>진실로 이와 같은 경우라야 인에 대한 공부가 비로소 친절 유미하여져서, 광대 무변함에 손댈 바를 모르게 되고 걱정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물을 곧 나인 줄 잘못 아는 병통이 없어 심덕이 온전하게 됩니다. <BR>그러므로 정자는 "[서명]이야말로 그 뜻이 지극히 완비되었으니, 이것이 곧 인의 체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 인이 남김없이 충만될 때 성인이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BR>
<P align=left><BR><STRONG> <BR>제삼 소학도 (第三 小學圖) </STRONG><BR>
<P align=left><BR><IMG style="CURSOR: pointer" onclick=imgSize_OPEN(this.src) src="http://iktc.org/tech_iktc/data/board/ccsr/file_in_body/1/3bcd2c7d01.gif" borde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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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소학제사 (小學題辭)<BR></STRONG>小學 ; 개인도덕 수양서, 주로 개인적인 수양을 위해 배우는 유교 교과서, 大學과 대비 부모공경 마음 바로잡기 등에 대해 주자가 저술함, <BR>題 ; 제목, 머리말, 辭 ; 말, 말하다,<BR>소학제사 설명 <BR>원(元), 형(亨), 이(利), 정(貞)은 천도의 상, 즉 하늘의 불변의 법칙이고,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인성의 강(綱) 즉, 인간의 벼리가 되는 본성이다.<BR>이 인간의 본성들은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네 가지 단서인 "사단"이 풍성히 감동됨에 따라 드러난다. <BR>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께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손히 대하는 바로 이것이 "병이(秉彛)"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순리적으로 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BR>오직 성인만이 그 본성이 자연적으로 실현되어 하늘과 같이 넓어서, 털끝 만큼의 힘으로 더하지 않아도 "온갖 선함(萬善)"이 다 갖추어진다.<BR>일반 사람들은 어리석어 물욕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그 도리를 무너뜨리고 서슴없이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진다. 성인이 이것을 가엾게 여긴 나머지 학문을 만들고 스승을 두고 가르치어 그 본성의 뿌리를 북돋는 한편 그 가지를 뻗게 하였다.<BR>[소학]의 방법은 쇄소(灑掃)하고 응대(應對)하며,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남에게 공경하여 행동이 조금도 법도를 어김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완전히 행하고 난 다음에 힘이 남으면 시를 외고, 글을 읽고, 노래를 읊조리고, 춤을 추며 모든 생각이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 이 법의 궁구와 깊이 생각하여 몸을 닦음이 이 학문의 큰 뜻이며 목적이다.<BR>밝은 명(明命)은 환하여 안팎이 없다. 덕을 높이고 학업을 넓혀야 곧 본래의 본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것이 옛날에 부족하지 않았다고 하여 오늘날 어찌 넉넉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세월이 멀리 흘러왔고, 어진 사람들이 돌아갔는데다 경전들은 피폐되고 교육마저 해이해져, 어린이의 양육이 바르지 못하매, 자란 뒤에는 더욱 부박하고 사치스러워진다. <BR>마을에는 좋은 풍습이 없어지고 세상에는 어진 인재가 없으며, 사리 사욕으로 뒤얽혀 싸우고 이단의 말들이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병이는 하늘에 표준을 둔 것이어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에 옛날에 들어온 말들을 주워 모아 뒷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하노라.<BR>애달프다! 소년들이여! 삼가 이 글을 배우도록 하라. 이것은 늙은 나의 노망한 소리를 적은 것이 아니라 오직 성인의 가르침이니라. <BR>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대가 사람에게 [대학]의 도를 말하려 하면서도 또 [소학]의 글을 참고하려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었다.<BR>주자는 그말을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배움의 크고 작음은 확실히 같지 않으나 '도'가 되는 점에 있어서는 한 가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릴 때에 [소학]에서 익히는 것이 없으면, 그 방심을 거두고 덕성을 길러서 [대학]의 기본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커서 [대학]을 더 배우지 않는다면 의리를 살피고 그것을 사업에 시행함으로써 [소학]의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어린 학도로 하여금, 반드시 먼저 쇄소응대하든가 진퇴하는 가운데,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학습들에 스스로 진력함으로써, 자라난 뒤에는 '명덕'과 '신민'하는 일에 나아가 '지극히 선한 경지'에 까지 가서 머물게 하려는, 이것이야 말로 순서상 당연한 것이니, 어찌 불가하겠는가?"<BR>어떤 사람이 또 "만일 나이가 이미 자랐는데 공부가 이렇게 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자, 그에 답하여 이렇게 말했다. "세월이 이미 지나간 것은 물론 뒤따라 갈 수 없지만, 공부의 차례나 조목은 어찌 다시 보충하지 못하겠는가? 내가 듣기로는, '경'이라는 한 글자는 성학의 시초와 종국을 성립시켜 주는 것이라 한다. [소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이것을 기 초로 하지 않으면, 참으로 본원을 함양하여 쇄소·응대·진퇴에 관한 법도 및 육예의 가르침에 마음을 쓰지 못하게 된다. [대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이것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역시 총명을 개발하여 덕을 닦고 학업을 익히어 '명덕', '신민'의 공을 가져오지 못한다. 불행히도 때가 이미 지난 뒤에라도 배우는 사람들이 참으로 이것에 힘을 기울여 큰 것을 닦아 나아가게 되는 동시에 그 작은 것을 겸하여 보충할 수 있다면, 그 나아가게 하는 소이로서는 장차 근본이 없어서 스스로 도달하지 못 할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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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퇴계선생 말씀<BR></STRONG>위의 [소학]은 옛날에는 그림이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본서의 목록에 의거하여 이 그림을 만들어서 대학의 그림과 대조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자가 [대학혹문]에서 [대학], [소학]에 대하여 통론한 것을 인용하여 양자의 공부하는 대강을 나타내었습니다.<BR>원래 [소학]과 [대학]은 서로 상대적으로 기다리면서 성립합니다. 이것들이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혹문]에서는 그것들을 통론할 수 있었고, 이 두 그림에서도 겸수상비하여 말할 수 있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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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제사 대학도 (第四 大學圖)</STRONG><BR>
<P align=left><BR><IMG style="CURSOR: pointer" onclick=imgSize_OPEN(this.src) src="http://iktc.org/tech_iktc/data/board/ccsr/file_in_body/1/4b4ebc7d01.gif" borde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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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대학경 (大學經)</STRONG> <BR>大學 ; 공자의 말을 증자가 기록한 교과서, 소학이 주로 개인적인 영역을 언급한다면 대학은 사회관계성을 다룸, <BR>명명덕(明明德; 명덕을 밝히는 일)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BR>지지선(止至善; 지선에 머무르는 일) 이 대학의 三綱領이고,<BR>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 (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의 팔조목(八條目)으로 정리<BR>하여 유교의 윤곽을 제시하였다.  <BR>대학경 설명<BR>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에 있으며, 지극히 선한 경지(至善)에서 머무는 데(止) 있다 .<BR>머무를 데를 안 뒤에야 정함이 있고, 정한 뒤에야 동요되지 않을 수 있으며(靜), 동요되지 않은 뒤에야 편안할(安) 수 있다.<BR>편안한 뒤에야 생각할 수 있고(廉), 생각한 뒤에야 얻을(得) 수 있다.<BR>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시초와 종결이 있으니, 먼저 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워질 것이다. <BR>옛날 명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바로 잡았고, 그 집안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았고, 그 몸을 닦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였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참되게 했고, 그 뜻을 참되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앎을 투철히 했으니, 앎을 투철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는 데 있다. <BR>사물의 이치가 구명된 뒤에라야 앎이 투철하여지고, 앎이 투철하여진 뒤에라야 뜻이 진실하여지고, 뜻이 진실하여진 뒤에라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라야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뒤에라야 집안이 바로 잡히고, 집안이 바로 잡히고 난 뒤에라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라야 천하가 화평하게 된다.<BR>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 몸을 닦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 말단이 다스려지는 법이 없으며, 후하게 해야 할 데에 박하게 하고, 박하게 해야 할 데에 후하게 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BR>어떤 사람이 묻기를 "경이란 어떻게 힘써야 하는 것인가?" 하였더니, 주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정자는 일찍이 '주일무적', 즉 정신을 통일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또 ' 정제엄숙', 즉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마음을 엄숙히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BR>문인인 사씨의 설로는 이른바 "항상 경계하여 깨달으려는 방법"이며, 윤씨의 설로는 "그 마음을 단속하여 한 가지의 잡념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 운운하였다.<BR>경이란 한 마음의 주재이며, 만사의 근본인 것이다. 그 힘쓰는 방법을 알면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고서야 시작될 수 있음을 알게 되며,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고서 시작되는 것임을 알면 [대학]이 이것에 의지하여야만 끝 맺을 수 있는 것도 일관하여 의심하지 않게 된다.<BR>원래 이 마음이 이미 있게 되면, 이 경에 의하여 사물을 밝히고, 앎을 투철히 하여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구하면, 이것이 이른바 덕성을 놓이고 학문을 일삼는 것이다. 경에 의하여 뜻을 진실히 하고 마음을 바로 잡아 자신의 몸을 닦으면, 이것이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에 의하면 집안을 바로잡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에<BR>까지 미치면, 이것이 이른바 "자기 자신을 닦아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고, "공손한 태도를 독실히 하여 천하가 화평하여 진다"는 것이다. 이상의 모든 것이 다 하루라도 "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경이라는 한 글자가 성학의 시작과 끝맺음에 걸친 일관된 요건이 아니겠는가!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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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퇴계선생 말씀</STRONG><BR>위의 글은 공자가 남긴 첫 장입니다. 국초의 신하 권근이 근래에 이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장 아래에 인용한 [혹문]의 [대학]과 [소학]을 통론한 설은 [소학도] 아래서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 두 설만 통하여 볼 것이 아니라, 상하의 여덟 그림도 모두 마땅히 이 두 그림과  통하여서 보아야 합니다.<BR>대저 위의 두 그림은 실마리를 구하여 확충하고, 하늘을 본받아 도를 다하는 극치점으로 [소학]과 [대학]의 포준 및 본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래의 여섯 그림은 선을 밝히고 자신을 참되게 하며, 덕을 높이고 학업을 넓히며, 힘을 기울여야 할 점으로 [소학], [대학]의 근거이자 공효가 되는 것입니다.<BR>그리고 경이란 상하에 다 통하는 것으로서, 공부를 착수하는 데서나 그 공부의 효과를 거두는 데서나 항상 실천하여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이 위와 같았으며, 이제 이 [십도]도 모두 경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태극설]에서는 정만 말하고 경은 말하지 않았는데, 주주자가 주해하는 가운데서 경을 말하여 보충하였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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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제오 백록동규도 (第五 白鹿洞規圖) </STRONG><BR>
<P align=left><STRONG><BR><IMG style="CURSOR: pointer" onclick=imgSize_OPEN(this.src) src="http://iktc.org/tech_iktc/data/board/ccsr/file_in_body/1/5b9e9b7cf1.gif" border=0>  <BR><BR clear=all></STRONG><BR>
<P align=left><STRONG>동규후서(洞規後敍)<BR></STRONG>백록동(白鹿洞) ; 중국 강서성 성자현 백록동에 있는 서원을 말함, <BR>規 ; 법, 법칙, 규약, 敍 ; 처례, 서문, <BR>동규후서 설명<BR> 희(熹)가 가만히 살펴보니, 옛날의 성현이 사람들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한 뜻은 어느 것이나 다 의리를 강명(講明)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닦은 다음에 그것을 미루어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려는 것이지, 한갓 낡은 것을 외는 데 힘쓰고 문장을 일삼음으로써 명성이나 구하고 이록(利祿)이나 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와 반대된다.<BR>그러나 성현이 사람들을 가르치던 법은 경전에 갖추어져 있다.  뜻 있는 선비는 마땅히 숙독(熟讀)하고 깊이 생각하여 묻고 변해야 할 것이다.<BR>진실로 이의 당연함을 알아가지고 자신을 책하여 반드시 이에 따르게 한다면, 준칙과 금방(禁防)을 어찌 다른 사람들이 마련하여 준 뒤에 지켜지길 기다리겠는가.<BR>근세 학교에는 규약이 있지만, 학자를 대함이 이미 천박하고, 그 법이 또한 결코 옛 사람들의 뜻에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학당에서는 그것을 되풀이하여 시행하지 않겠으며, 특히 성현들이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한 큰 근본을 취하여 위와 같이 조목을 지어 처마 현판에 게시한다.<BR>제군이 이것을 서로 강명하고 준수하여 몸소 실행하도록 한다면, 사려·언행에서 그 계근공구(械謹恐懼)하게 하는 것이 반드시 저 규범보다 더 엄할 것이다.<BR>만일 그렇지 못하고 혹 규칙 밖으로 벗어나는 점이 있다면, 저 이른바 규약이란 반드시 취하여야 할 것이지 참으로 생략할 수 없는 것이다. 제군은 그것을 명심하도록 하라.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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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퇴계선생 말씀<BR></STRONG>위의 규는 주자가 지어 백록동(白鹿洞) 서원의 학도에게 게시한 것입니다.  이 백록동은 남강군 북쪽, 광려산 남쪽에 있는데, 당의 이발이 여기에 은거하여 흰 사슴을 기르며 지냈으므로, 백록이라는 것이 그 동의 이름으로 되었습니다. 남당 때에 서원을 세워 국상이라 하였는데, 학도가 항상 수백 명씩 되었습니다. <BR>송태종이 서적을 나누어 주는 한편, 동주에게 관직도 주며 아끼고 권장하였습니다. 중간에 황폐된 일도 있었으나, 주자가 지남강군사로 왔을 때 조정에 청하여 중건하고 학도를 모아 규를 만들어 도학을 앞장서 밝히자 서원의 가르침이 마침내 천하에 성행하게 되었습니다.<BR>신이 이제 삼가 규문의 본 조목에 의하여 이 그림을 만들어 보고, 살피시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원래 당우 시대의 가르침은 오품(五品)에 있었고, 삼대의 학문은 모두 인륜을 밝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왕의 학문은 그 준칙과 금지의 조목이 비록 일반 학문과 서로 다 같지 않지만, 이륜(彛倫)에 근본을 두고서 궁리를 하고 역행하면서 저 심법의 절실히 요긴한 점을 구하는 것은 같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 도도 함께 바쳐, 아침 저녁으로 아뢰는 설어(說御)의 잠언에 보태는 것입니다.<BR>
<P align=left>이상 다섯 도는 천도에 근본한 것인데, 그 공은 인륜을 밝히고 덕업을 힘쓰는 데 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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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 제육 심통성정도 (第六 心統性情圖)</STRONG> <BR>
<P align=left><BR><IMG style="CURSOR: pointer" onclick=imgSize_OPEN(this.src) src="http://iktc.org/tech_iktc/data/board/ccsr/file_in_body/1/6bdc9c5eb1.gif" border=0>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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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심통성정도설 (心統性情圖說)</STRONG> <BR>心 ; 마음, 統 ; 거느리다, 性情 ; 웃고, 울고, 슬프고, 사랑하고 등의 마음의 활동,<BR>심통성정도설 <BR>마음이 性(성)과 情(정)을 통섭하였다는 것은 사람이 오행의 빼어난 것(秀)을 받아 태어났고,  빼어난 오행에 오성(五性)이 갖추어지고, 그 오성이 동(動)하는 데서 칠정(七情)이 나옴을 말한다. <BR>무릇 성과 정을 통회하게끔 하는 것이 마음이다. 그런 까닭에 그 마음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아 "성"이 되면 "심(心)의 체(體)"이고, 마음이 느끼어 마침내 통하여 "정(情)"이 되면 "심(心)의 용(用)"이다.<BR>장자는 말하기를 "마음은 성과 정을 통섭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적당하다. 마음이 성을 포함하는 까닭에 '인, 의, 예, 지'를 성이라 하며, 또한 "인의의 마음"이라 하는 말도 있다.<BR>마음이 정을 포함하는 까닭에 측은, 수오, 사양, 시비를 정이라 하며, 또한 측은한 마음이니 "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이라 하는 말도 있다. 마음이 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미발(未發)의 중(中)"을 이루는 일이 없어 성이 무시되기 쉽고, 마음이 정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중절(中節)의 화(和)"를 이루는 일이 없어 정이 방탕하기 쉽다. 배우는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서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그  성을 기르고 정을 제약한다면 배움의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BR><BR>
<P align=left><BR> 
<P align=left><STRONG>퇴계선생 말씀<BR></STRONG>신이 삼가 생각하여 보면, 정자의 호학론(好學論)에는 "정(情)을 제약한다"는 것이 "마음을 바로잡고, 성(性)을 기른다"는 것의 앞에 두었는데, 여기에서는 그것을 도리어 그 뒤에 두었습니다. 그 까닭은 이것으로 "마음이 성과 정을 다 포함하였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오나 그 이치를 궁구하여 말한다면, 마땅히 정자가 논한 순서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도에 온당하지 못한 곳이 있기에 조금 고쳤습니다.<BR>이상의 삼도 중에서 위의 일도(一圖)는 임은 정씨가 그린 것인데, 그 설도 그의 것입니다. 그 가운데의 것과 아래의 도(二圖)는 신이 망령되게도 성현들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뜻의 근원을 추구하여 지은 것입니다.<BR>가운데의 도는 기품 중에서 "본연의 성"이 "기품(氣稟)"과 혼합되지 않음을 가르켜 말한 것입니다. 자사가 말한 "천명의 성", 맹자가 말한 "성선(性善)의 성", 정자가 말한 "성이 곧 이(理)라는 성", 장자가 말한 "천지의 성"이 그것입니다. 그 성을 말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발하여 정(發而爲情)이 되는 것도 모두 그 선한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BR>예를 들면 자사가 말한 "중절(中節)의 정",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의 정", 정자가 말한 "어찌 선하지 않은 것으로 이름지을 수 있겠느냐는 정", 주자가 말한 "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본래 선하기만 한 정"이 이러한 것입니다.<BR>아래의 도(圖)는 이(理)와 기(氣)가 합한 점으로 말한 것입니다. 공자가 말한 "서로 근사하다는 성", 정자가 말한 "성(性)이 곧 기(氣)이며 기가 곧 성이라는 성", 장자가 말한 "기질의 성", 주자가 말한 "비록 기 중에 있지만 기는 어디까지나 기이고 성은 어디까지나 성으로서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성"이 이러한 것입니다. 그 성을 말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 발하여 정이 되는 것 역시 이기가 서로 기다리거나, 혹은 서로 해가 되는 점으로 말한 것입나다.<BR>예를  들면 사단과 칠정 같은 것입니다. 즉 사단은 이가 발하매 기가 따르는 것이어서 본래 순선무악하지만 반드시 이의 발함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에 가리어지면 불선으로 됩니다.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 중절하지 못하여 그 이를 어그러뜨리면 방일하여져 악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정자는 "성만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불비(不備)하고, 기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불명하다 . 두 가지를 따로 분리하는 것은 옮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자나 자사가 이만  가리켜 말한 까닭은 불비하여서가 아니라, 기를 아울러 말하면 성의 본래 선함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운데 도(圖)의 뜻입니다.<BR>요컨데 이와 기를 겸하였으며 성과 정을 포함한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성이 발하여 정이 될 때가 곧 한 마음의 기미이고, 온갖 변화의 추요이며, 선악의 분기점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경의 태도를 지니는 데 오로지 하여, 천리와 인욕(人慾)의 분별을 분명히 알 뿐 아니라 더욱 이것들을 몸소 주의함으로써, 마음이 발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존양의 공부(存養之功)가 깊어지고, 마음이 발동하였을 때에는 성찰의 습관이 익숙하여져서 참을 쌓고 오래 힘써 마지 않을 수 있다면, 이른바 "정일(精一)"의 방법으로 중(中)을 포착한다는 성학과, 본체를 보존함으로써 어느 경우에나 응용한다는 심법(心法)이라는 것이 모두 다른 곳에서 구하여 하기 전에 여기에서 얻어질 것입니다.<BR> <BR>
<P align=left><BR><STRONG>제칠 인설도 (第七 仁說圖) </STRONG><BR><BR><STRONG>
<P align=left><BR><IMG style="CURSOR: pointer" onclick=imgSize_OPEN(this.src) src="http://iktc.org/tech_iktc/data/board/ccsr/file_in_body/1/7c0cebcb31.gif" border=0> <BR>
<P align=left><BR><BR clear=all></STRONG><BR><BR> 
<P align=left><STRONG>인설(仁說)<BR></STRONG>인(仁)이란 만물을 낳는 천지의 마음이며, 또한 사람이 이것을 얻어 사람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BR>아직 발하기 저에 마음에 "사덕(四德)"이 갖추어져 있지만, 오직 "인"만이 사덕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인은 함육하여 온전하게 하는 것이며 포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생(生)의 성(性)"이니 "애(愛)의 이(理)"이니 "인(仁)의 체(體)"니 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BR>이미 발동하였을 때에는 사단(四端)이 드러나지만, 오직 "측은(惻隱)"만이 사단에 관통되고 있다. 그러므로 측은이란 두루 흐르면서 관철되는 것이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BR>이른바 "성(性)의 정(情)"이니 "애(愛)의 발(發)"이니 "인(仁)의 용(用)"이니 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BR>전체적으로 말하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 즉 "미발(未發)"은 체(體)이고 , 이미 발동한 것, 즉 "이발(已發)"은 용(用)이다. 부분적으로 말한다면 "인"이 체이고, "측은"이 용이다.<BR>"공"이라는 것이 인을 체험하도록 하는 바탕이다. 이를테면 자기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감이 인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개 공하며 인하여지고, 인하면 애하여진다. 효제(孝悌)가 그 실제상의 용이고, "서(恕)"가 그 효제를 펴나가는 것이고, "지각(知覺)"은 그것을 아는 일이다.<BR>천지의 마음은 그 덕을 네 가지 가지고 있다. '원(元)·형(亨)·이(利),정(貞)'이 그것이다. 그런데 원은 이것들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들이 운행하면 '춘, 하, 추, 동'의 차례로 되는데, 이 중에서도 봄을 생하는 기운이 제 계절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BR>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도 네 가지의 덕이 있다. 곧 '인, 의, 예, 지'가 그것인데, 인은 다른 덕을 모두 포함한다. 네 가지 덕이 발용하면 '애(愛), 공(恭), 의(宜), 별(別)'이라는 것으로 되는데, 측은의 마음, 즉 애의 정이 다른 정들에 관통된다.<BR>무릇 인이란 도리로서는 천지가 사물을 낳는 마음이 사물에 즉하여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 이 인의 본체가 이미 갖추어져 있고 정이 발한 뒤에는 그 인의 용이 한정이 없다. 참으로 인을 체험하여 보존할 수만 있다면, 모든 선의 원천과 백 가지 행위의 근본이 다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공문(孔門)의 가르침이 반드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을 찾는 일"에 급급하도록 하는 까닭이다. <BR>공자의 말씀에 "극기하여 예로 돌아가면 인을 하게 된다"고 한 것이 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면 자기의 사심을 이겨내고 천리에 돌아갈 수 있으면 이 마음의 본체가 다 있게 되며 이 마음의 작용이 다 행하여지게 됨을 이르는 것이다.<BR>집에 있을 때에는 공의 태도를 가지고, 일을 볼 때에는 경의 태도를 가지며, 남을 대할 때에는 충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보존하게끔 하는 근거이다.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제(悌)로 형을 섬기고, 서로 사물을 다루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운용하게 하는 근거이다.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천지에서는 앙연(怏然)히 만물을 낳는 마음이고, 사람에게서는 온연히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니, 사덕을 포함하고 사단을 관통한 것이다.<BR>어떤 사람은 "그대의 말과 같다면, 정자의 이른바 애는 정이고 인은 성인 만큼 애로써 인이라 이름할 수 없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인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정자의 이른바 "애의 발로로서 인이라 이름하는 것"은 내가 논한 애의 이를 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BR>무릇 정(情), 성(性)이라 하는 것은 비록 그 구분되는 영역은 다르지만, 그 맥락이 통하는 점에서는 각각 속하는 점이 있으니, 어찌 서로 떨어져 상관없는 것이겠는가? 나는 배우는 사람들이 정자의 말씀을 외기만 하면서 그 뜻을 구하지 않아, 마침내 판연히 애를 떼어버리고 인으로 말하는 것이 걱정이어서, 특히 이것을 논하여 그 남긴 뜻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대가 정자의 설과 다르다고 하니 또한 오해가 아니겠는가?<BR>혹은 말하기를 "정자의 문도들에는 만물이 나와 하나라는 것을 '인의 체'라 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을 가지고 인이라는 말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틀린 것인가 "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이렇게 답하겠다.<BR>만물과 내가 하나라고 하는 사람은  "인이 애"임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이 "체"가 되는 참된 연유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에 지각이 있음을 말하는 사람은 "인이 지를 포함하는 것"임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는 알찬 연유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공자가 자공의 " 박시제중의 물음"에 대답한 것과 정자의 이른바 "지각으로는 인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어찌 이것을 가지고 인을 논할 수 있겠는가? <BR><BR>
<P align=left><BR> 
<P align=left><STRONG>퇴계선생 말씀 <BR></STRONG>위의 인설은 주자가 지은 것으로서, 또한 스스로 도(圖)까지 만들어, 인의 도리를 남김없이 밝힌 것입니다.<BR> [대학]에 말하기를  "임금된 사람은 인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옛 제왕의 마음을 전하고 인을 체험한 묘리(妙理)를 구하려 한다면 어찌 여기에 뜻을 남김없이 쏟지 않겠습니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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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STRONG>제팔 심학도 (第八 心學圖)</STRO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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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left><IMG style="CURSOR: pointer" onclick=imgSize_OPEN(this.src) src="http://iktc.org/tech_iktc/data/board/ccsr/file_in_body/1/8bdc9c7d01.gif" border=0>  <BR><BR clear=all><BR>
<P align=left><STRONG>심학도설(心學圖說) <BR></STRONG>心學 ; 마음의 학문 <BR>심학도설 설명<BR>적자(赤子)의 마음은 인욕(人慾)이 물들지 않은 양심이지만, 인심(人心)은 욕구에 눈뜬 것이다. 대인의 마음이란 의리가 다 갖추어진 본마음이고, 도심이란 곧 의리(義理)를 깨달은 것이다. <BR>이것은 두 가지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은 형기에서 발생되면 모두 인심이 없을 수 없게 되고, 성명에 근원하면 도심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BR>정일(精一)과 택집(擇執) 이하의 것은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게 하는 공부 아닌 것이 없다. 신독 이하의 것은 "인욕을 막는 점"에 관한 공부인데, 반드시 "부동심(不動心)"에까지 이르러야 부귀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며 위무(威武)가 마음을 꺽지 못하게 되어, 그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세워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BR>계수 이하의 것은 "천리를 보존하는 점"에 관한 공부인데, 반드시 "종심(從心)"에까지 이르러야 심(心)이 곧 체(體)이고 욕(欲)이 곧 용(用)이며, 체(體)는 또한 도(道)이고 용(用)은 또한 의(義)의 관계를 가지면서, 언행이 법도에 맞아서, 생각하지 않고서도 이해하게 되고 힘쓰지 않고서도 절도에 맞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공부하는 요령은 어디까지나 한결같이 경의 태도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이다. <BR>무릇 마음이란 "한  몸을 주재"하는 것이고, 경이란 또한 "한 마음을 주재"하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들이 "주일(主一) 무적(無敵)"의 설이라든가, "정제엄숙(整齊嚴肅)"의 설과 저 "마음을 수렴하고 항상 또렷한 정신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설을 깊이 궁구한다면 그 공부가 더할 나위 없게 되어, 성인의 경지에 충분히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BR><BR>
<P align=left><BR> 
<P align=left><STRONG>퇴계선생 말씀</STRONG><BR>
<P align=left>위의 것은 임은 정씨가 성현들이 심학을 논한 유명한 말씀들을 주워 모은 것입니다. 이 도를 만드는 데서는, 그 성현들의 말씀을 분류 대치시키기를 많이 하여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함으로써, 성학의 심법이 역시 일단에 그치지 않는 것이므로 전체에 다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위로부터 아래로 배열한 것은 다만 깊고 얕은 점과 생소하고 익숙한 점을 들어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이와 같다는 것일 뿐, 그 공부하는 과정에 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과 같이 선후의 절차가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BR>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의심하여, 이와 대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라면 "방심을 구함"이 공부에 있어 첫째의 일이므로 "심재(心在)"의 뒤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방심을 구함"이란 얕은 정도로 말하면 진실로 제일 먼저 착수 입각해야 하는 점이지만, 깊은 정도로 지극하게 말한다면 순식간이라도 일념이 조금만 어그러지면 역시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BR>안자 같은 분일지라도 3개월 이상이면 어기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어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곧 방의 상태에 들어선 것입니다. 다만 안자는 잘못 어그러져도 곧 그것을 알 수 있는데, 알면 곧 다시는 싹트지 않도록 하는 것이 역시 방심을 구하는 종류일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정씨도의 서술이 이와 같습니다. 정씨의 자는 자견(子見)인데 신안 사람입니다. 은거 생활을 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고, 그 생실에는 의리에 맞는 점이 매우 많았습니다.<BR>백발이 되어서는 경전의 연구에 깊은 이해가 있어 [사서장도] 3권을 지었습니다. 자견이 원하지 않아 곧 향군 박사로 되었다가 치사하고 돌아갔습니다. 그의 사람됨이 이와 같사오니, 어찌 일정한 견해 없이 함부로 지었겠습니까? <BR>
<P align=left><BR> 
<P align=left><BR><STRONG>제구 경재잠도 (第九 敬齋箴圖)</STRONG><BR>
<P align=left><BR><IMG style="CURSOR: pointer" onclick=imgSize_OPEN(this.src) src="http://iktc.org/tech_iktc/data/board/ccsr/file_in_body/1/9b0e6c0e71.gif" border=0>   
<P align=left><BR><BR clear=all><BR> 
<P align=left><STRONG>경재잠 (敬齋箴)</STRONG> 敬 ; 공경하다, 삼가다, 齋 ;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 箴 ; 경계하다,<BR>경재잠 설명<BR>의관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있기를 마치 상제를 대하듯 하라. 발가짐(足容)은 반드시 무겁게 할 것이며, 손가짐(手容)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여야 하니, 땅은 가려서 밟아, 개미집 두덩까지도 (밟지 말고)돌아서 가라. <BR>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뵙듯 해야 하며, 일을 할 때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조심하여, 혹시라도 안이하게 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BR>입 다물기를 병마개 막듯이 하고, 잡념 막기를 성곽과 같이 하여, 성실하고 진실하여 조금도 경솔히 함이 없도록 하라. <BR>동쪽을 가지고 서쪽 가지말고, 북쪽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지 말며, 일을 당하여서는 그 일에만 마음을 두어, 그 마음씀을 딴 데로 가지 않도록 하라. <BR>두 가지, 세 가지 일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직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피도록 하라. 이러한 것을 그치지 않고 일삼아 하는 것을 곧 " 경을 유지함", 즉 "지경(持敬)"이라 하니, 동할 때나 정할 때나 어그러짐이 없고, 겉과 속이 서로 바로잡아 주도록 하라. <BR>잠시라도 틈이 벌어지면 사욕이 만 가지나 일어나 불꽃도 없이 뜨거워지고 얼음 없이 차가워 지느니라.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바꾸고 삼강(三綱)이 멸하여지고 구법(九法) 또한 못 쓰게 될 것이다. 아! 아이들이여! 깊이 마음에 새겨 두고 공경할지어다. <BR>먹을 갈아 경계하는 글을 씀으로써 감히 영대(靈臺)에 고하노라. <BR>주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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