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불교신문 대불련 50주년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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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12.01.26 조회3,563회 댓글2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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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ㆍ수행ㆍ대중불교 서원… 불교계에 새 바람 | ||||||||||||||||||
기획연재- 2013 대불련 50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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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1960년대 - 전국적인 학생불교운동의 태동기
한국대학생불자연합회(이하 대불련)가 2013년 9월 1일 창립 50주년을 맞는다. 해방과 민주화 등 역사의 흐름 속에 대불련은 청년불교의 대표단체로 80년대 민중불교운동, 90년대 재가불교운동, 2000년대 참여불교운동 등을 이끌었다.
하지만 현재 대불련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취업난으로 인한 교내 학업경쟁으로 이미 많은 대학에서 법회가 실종된 상태다. 또 학생들을 지도하는 지도교수와 지도법사 등의 관심이 줄어들며 학교와 지역, 또 불교계 간 네트워크가 무너졌다. 이런 시기 대불련 50년을 앞두고 각 시기 상황과 문제해결을 위한 대학생 불교운동의 흐름을 짚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대학생 불교운동의 시작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1950년대 단과대학별로 진행됐지만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조직이 구성된 것은 1963년 3월 24일부터로 볼 수 있다.
1963년 3월 24일 조계사 총무원 회의실에서 사상 첫 간담회를 가진 한국대학생불자연합회는 8월 28일 조계사 학생회관에서 동국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 17개 대학과 삼군사관학교 학생 50여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발기인대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이날 봉은사로 이동해 1만 배를 올리며 불교 중흥을 발원했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있었던 대학생 불교활동을 조직적인 연합회 활동으로 발전시키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청년불교운동이 불교계에 새바람을 일으키기를 서원한 이들은 9월 1일 동국대 중강당에서 창립대회를 열고 대불련을 정식 창립한다. 대불련은 창립의 주요 이념으로 ‘지성’ ‘수행’ ‘민족’ ‘대중’ 불교의 기치를 내걸었으며 동시에 전국 대학생 불교연합회 조직, 사회봉사 및 국민계몽, 민족문화재 보호, 국제교류 등을 사업계획으로 수립했다. 대불련은 주1회 법회, 정기 수련회를 진행했으며 매년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사상강연회를 통해 젊은 불자들을 대상으로 포교를 펼쳤다.
당시에도 젊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데서 더 나가 단체활동에 나선 것은 생소하고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성의 상징인 대학생들이 불교단체를 만들자 당대의 선지식들이 대불련을 지원하고 지도했다. 이 당시 대불련 활동을 이끌어준 스님들이 바로 성철 스님, 탄허 스님, 광덕 스님 등이었다. 초대 회장에는 신호철 씨(서울대)가 선임됐다. 해인사와 월정사 등지에서 큰 스님들의 지도하에 수련대회 등을 통해 전국 대학생들의 신행활동을 이끌어간 대불련은 1965년 3월 대의원 총회를 거쳐 지부설립을 결의하고 서울, 충남, 강원, 경남, 전북지부 등 1967년까지 56개 지회를 설립한다. 또 1967년 3월 대의원 총회에서는 대불련 회기 및 마크, 회가가 제정된다.
1967년 4월 23일에는 봉은사에서 제1차 명예회원 추대식을 개최해 탄허, 행원, 능가, 광덕, 스님을 비롯해 서돈각, 이기영, 김영두 홍정식, 이종익, 서경수, 이한상 등 14명을 명예회원으로 추대했다.
같은 해에는 대불련 출신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학사불교회가 창립된다. 10월 3일 김윤권 초대회장을 비롯해 50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조계사 학생회관에서 학사불교회 발기인총회를 열고 학사불교회를 창립했다.
초기지만 대외적인 행보도 가속화돼 5일에는 최동수 명예회원이 대불련 대표로 세계불청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대불련은 1965년 제2차 전국대의원 총회를 계기로 4월 10일 창가학회 규탄대회를 조계사에서 여는 등 대외적인 행보에도 나섰다. 5월 초파일에는 불교인식 여론조사 및 각 주요기관 자비등 점등, 제1회 제등행렬 등에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다. 5월 21~25일에는 대구 청구대 불교부 주최 하에 한국 현대화와 종교인의 사명을 주제로 대종교제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당시 15개 대학이 참여하는 등 성황을 이뤘다.
대학생 불자로서 대불련이 불교계에 남긴 족적은 군승제 도입에서 드러난다. 군포교가 발돋움하던 시기 10여년 전 이승만 정부 당시 도입된 군목에 비해 군승제 도입은 미진한 상태였다. 이런 답보상태는 당국의 무성의와 타종교의 방해로 인한 요인이 컸다. 1967년 3월 19일 봉은사에서 열린 제4차 전국대의원 총회에서 당시 불교계 요구사항인 군종승제도 실현 촉구 결의문을 채택한 대불련 대표들은 4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 예비위를 거쳐 전국 각 대학의 목소리를 수렴해 4월 11일 군종승제도 추진위를 결성하고 군승제도 실시를 재차 촉구했다. 이어 17일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예비회의를 통해 결의문을 작성한다.
4월 18일 조계사에서 500여 청년불자들이 군종승 추진 촉구대회를 여는 가운데 이무웅 회장을 비롯해 김동길 사무장 등 대불련 대표들은 국방부 대표인 인사국장 정승화 소장을 만나 불교계 요구를 전달한다.
정 소장은 4월 30일까지 군종위원 임명 및 불교대표 2명을 군속으로 임명하기로 하고 군승준비위를 5월 31일까지 국방부에 설치키로 약속했다. 이후 구체적인 준비단계를 거쳐 1968년 11월 30일 5명이 최초의 군승으로 임명된다. 대불련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불교계의 관심과 지원이 지속되자 전국 각 대학에서 불교학생회가 불같이 일어났다.
기존의 동국대, 고려대 등 불교학생회에 이어 서울대 단과대 학생회를 통합한 서울대 총불교학생회가 1968년 11월 8일 창립됐으며 성균관대, 이화여대 서강대 등에서도 불교학생회를 창립했다. |
댓글목록
강손주님의 댓글
강손주 작성일
선배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후배들이 잘 해야 할텐데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윤제철님의 댓글
윤제철 작성일옛날 사진을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 때 선배님들은 신심에 가득차 있었고, 저는 그저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차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