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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獨)살이를 보라 --법정 스님의 글(1964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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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태형 작성일2013.06.04 조회3,7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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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독(獨)살이를 보라  ---법정 스님의 글(1964년 10월 25일)

원융(圓融)한 회중(會中)이어야 할 대중처소가 <독(獨)살이>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절이란 곳이 그 어느 특정인의 소유거나 개인의 저택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상식입니다. 오직 수도자가 도업을 이루기 위해, 한데 모여 서로 탁마(琢磨)해 가면서 정진해야할 청정한 도량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절이 소수의 특정인에 의해 수도장으로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이제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기네 <패거리>의 식성에 맞는 몇몇이서만 도사리고 앉아 굳게 문을 걸어 닫고 외부와의 소통[交通]을 차단한 채 해져가고 있습니다. 전체 수도자의 광장이어야 할 이 수도장이 -.

따라서 엄연하게 대중이 모인 회상(會上)임에도 대중의 의사가 무시되기 다반사(茶飯事)이며 결코 건전한 것일 수 없는 개인의 좁은 소견이 전체대중의 이름을 사취(詐取)하여 제멋대로 행사되는 수가 많습니다. 종래로 우리의 청백(淸白) 가풍인 <대중공사법>이 날이 갈수록 그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으니 이것은 곧 화합과 청백성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디를 가나 구역이 나는 것은 <권속(眷屬; 문중) 관념>이라는 그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악취(惡臭) -. 그래서 원융(圓融)한 회중(會中)이어야 할 대중처소가 <독(獨)살이>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이른바 세속을 떠났다는 이 출세간에서까지 튼튼한 배경[빽]이 없이는 방부조차 내밀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운수(雲水)를 벗하여 훌훌 단신 수도에만 전념하던 납자들이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정착할 곳이 없어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소위 독신 수도한다는 이 비구승단의 회상에서 정화 이전이나 다름없는 냉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절은 마땅히 수행하는 이의 집이어야 할 것임에도 -. 개인과 의자(직위)의 한계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법이 선 사회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류들은 이 한계마저 무시하고 개인이 의자의 힘을 빌어 권력같은 것을 신경질적으로 휘두르기가 예사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녁노을만치도 못한 하잘 것 없는 권세라는것을. 더구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뇌이고 하는 이 출세간에서 -.

그래서 대중이 모인 회상에서 공부해보겠다고 마음 내어 모처럼 찾아갔던 초학인(初學人)들도 발붙일 곳이 없어 되돌아가서는 생각을 고쳐먹고 저마다 <독살이>인 자기 영토를 마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여 구도의 빛은 바래져 가고 사명감도 내동댕이치게 된 것입니다. 그 길이 가야 할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아닌 줄을 분명히 알면서도 -.

부처님!
이런 시시한 일들에 탐착하자고 저희들이 문안에 들어선 것이겠습니까? 두골(頭骨)의 크기와는 당치도 않은 감투나 뒤집어쓰고 우쭐거리자고 출가한 것이겠습니까?

   어서 이 혼탁(混濁)을

부처님!
당신에게 올리는 이 글도 이제는 그만 끝을 맺어야겠습니다. 제 목소리가 너무 높아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무 일 없이 조용하기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좀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이면 대개가 유쾌한 대열에는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자신부터 유쾌한 기분으로 쓸 수는 없었기에.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의 입을 빌어서든지 이러한 자기비판쯤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혼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귀촉도(歸蜀途)의 외침이라도 있어야겠습니다.

구도의 길에서 가장 뗄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허세로써 위장할 것이 아니라, 때때로 자기 위치를 돌이켜보는 참회의 작업일 것입니다. 자기 반성이 없는 생활에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종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현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없는 종교라면 그것은 하등의 존재가치도 없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우리 강토에 들어온 지 1,600년! 오늘처럼 이렇게 병든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물을 것도 없이 제자 된 저희들 전체가 못난 탓입니다. 늘 당신에게 죄스럽고 또 억울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처럼 뛰어난 당신의 가르침이 오늘날 저와 같은 제자를 잘못 두어 빛을 잃고 또 오해까지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밝혔다시피 저의 이러한 작업이 이웃을 헐뜯기 위해서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입을 여는 순간 일을 그르친다[開口則錯]>이라는 말을 저는 늘 믿어 오고 있는 터입니다. 그러면서도 굳이 입을 열어 한량없는 구업(口業)을 지은 것, 외람되게나마 진리를 향해서 길을 가고 싶은 저의 신념에서입니다.

한국불교의 건강은 저희들 제자의 공통한 비원(悲願)입니다. 무관심처럼 비참한 대인관계는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 무관심이 구도자의 주변에 뿌리내릴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죄악일 수도 있습니다. 일체 중생에게 주어진 당신의 자비가 무관심의 소산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주제넘게 고성으로 지껄인 것입니다. 이 혼탁을 어서 벗겨야한다는 비원에서 버릇없이 당신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언제인가는 과감한 일대개혁이 없이는 당신의 가르침이 이 땅에서는 영영 질식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박차고 나섰던 저 혼미한 브라만들에 대한 ‘부정의 결의’가 없고서는 -.

위의 글에서 좀 지나치리만큼 무차별한 사격을 가한 것은 우리들이 당면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에서였고 또 하나는 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의 아픈 곳을 향해 자학(自虐)적인 사격을 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 밝혀드릴 것은, 얼마 전에 이글을 쓰다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스스로 중단해버리고 말았는데 이런 사정을 알아차린 저의 한 고마운 도반이 격려해준 힘을 입어 다시 쓰게 된 것입니다. 비 개인 그 어느 여름날처럼 당신 앞에 가지런히 서서 업(業)을 같이하는 길[道程]의 청정한 인연에 조용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법정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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