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청 김연호 서각 전시회를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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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휴휴인 작성일2012.03.25 조회4,747회 댓글1건본문
3월24일 오후 3시에 목청의 서각 전시회 " 칼끝의 만다라" 개관을 한다고 했어나 대불련 경남 동문회의 오랜 법우들은 하루 먼저 조용할때 작품을 감상하고 회포도 풀자는 제안으로 서설(瑞雪)이 다음날 까지 내리는 3월 23일 제천으로 모였다.
목청관에서 권선여사의 보이차로 목을 축이고 가까이 있는 시민회관 전시실로 이동하여 작품들을 감상 하는데, 전시된 50여점의 작품들을 1년정도에 완성한것에 놀라고 다채로운 색을 과감히 표현 한것은 새로운 개척정신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오래전 부터 사찰,서원등 현판,주련등에 서각의 한분야가 분명히 존재 하였어나 전각의 한예속으로 취급된 것이 엄연한 맥이었다고 볼수 있어나 근자에 와서 서각이 독자적 예술로
발전하고 있는것도 부인 할수 없다 할것이다.
따라서 서각의 근원은 전각에서 비롯 되었다고 부인 못할 것이다. 근대 전각의 대가를 꼽어라고 하면 사람마다 다른 견해가 있어나, 완당선생으로 비롯되어 이상적,오경석,오세창,
안광석의 전통계승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시회에 출품된 향나무 가리개에 반야심경 글씨를
쓰고 목청이 새긴 운여 김광업(雲如 金廣業)도 위창(오세창) 어른의 훈도를 오랬동안 받았고 , 청사 안광석성생님도 雲如어른과 師兄師弟(입문은 청사 선생이 먼저 했어나 운여 어른이 연세가 청사 보다 11세 연장이라 사형이라고함)로 막연한 관계 였는데, 청사 선생님께서 전각강화(篆刻講話)에서 장법(章法~글씨의 선택과 배열) 즉 전각에서 방촌(方寸~한마디에 이르는 방위)에 문(文)을 모으고 용비봉건(龍飛鳳騫~용이 날고 봉이 차고 오르듯)
변화를 금석죽목(金石竹木)에 새기는 것이므로 장법이 중요하고 다음에는 글씨 즉 서법(書法)이 중요하며 마지막으로 칼이나 철필등 으로 새기는 것은 일필휘지로 서예를 하듯이
한호흡으로 새겨 나간다고 했다. 금석죽목 이라고 하였어니 나무에 刻을 하는것이 여기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매 목청의 서각 역시 이러한 금언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작고 하셨지만 목청 김연호는 살아 생전 청사 안광석師을 멀리 제천에서 청량리 우린각 청사 선생을 찾아뵙고 훈도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그분의 작품집 작품등을 수집하여 연구하고 공부 하였기에 비록 서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5년여 라고 하나 서화,골동등을 수집 하면서 많은 공부를 하고 앞에서 말한 장법,서법을 자연스럽게 터득 했어리라
짐작한다. 칼을 잡은지 5년은 그냥 5년이 아니라 목청이 60연간 살아온 불교를 종교로 하여 끊임없는 수행의 힘으로 또한 서화 전적등의 심미안과 감식안으로 현재의 작품으로 표출된 하나,하나의 서각 작품으로 생각한다. 완당 김정희 선생께서 만권의 책을 가슴에 품고(의역 하자면 만권의 책을 읽고 소화 하여) 일점획을 긋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서권기,문자향(書券氣,文字香)을 말씀 하셨다, 짐작컨대 책을 하도 많이 읽어 그 기운이 뻗쳐 나오고, 글을 쓰면 향기가 난다. 하는 것으로 이해 하는데,, 목청의 서각은 단순히 나무에 새긴 저명인의글씨,그림을 새긴것에 지나지 않고 목청의 다독(多讀)과 수행,
올곳한 마음씨, 학산스님 말씀 처럼,인욕과 정진이 오롯이 나타난 작품 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사대강건 하여 더 큰 이룸 있길 기원하며,
두어살 나이가 더 먹은 사람으로서 권고 하고 싶은 것은 , 장욱진 화백, 천석 박근술 화백이 단군 할아버지 이후 金石竹木에 刻을 하는것은 청사 안광석옹을 넘어서는 사람이 없다고 단언한 말을 참고 삼아 도법(刀法)을 면밀히 관찰하고 신라 선덕왕때 고승으로 서화에 밝고 우리나라 공전절후의 조각가로 일컬어 지는 양지(良志)스님의 신묘한 솜씨와
도행을 사표 삼길 바라며 일연선사가 삼국유사에서 찬한 頌으로 이글을 마침니다.
재 를 마치고 나니 법당앞의 석장이 한가 롭다.
깨끗이 단장한 향로에 단향을 피우면서, 남은 경(經) 다 읽고 나니 할 일이 없어
원만한 부처님 소상 만들어 합장 하고 보리라!
댓글목록
강손주님의 댓글
강손주 작성일
김연호 선배님!
존경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