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료실 <대불련 50년의 회상 ⑤>'대불련 구도부' - 치열한 구도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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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13.10.03 조회6,292회 댓글0건본문
<대불련 50년의 회상 ⑤>
‘대불련 구도부’ - 치열한 구도 정진
대불련이 창립한지 2년 후 그 조직 안에 1965년 5월 구도부를 구성했다. 구도회의 발족
목적은 교양불교에서 탈피하여 신앙불교로, 나아가서는 격외불교를 비약해 보려는 것이었다.
구도부는 그 해 7월부터 한달 여의 구도행각을 갖는다. 구도부원 14명은 전국 사찰을 돌며
효봉 스님, 경봉 스님, 향곡 스님, 월하 스님, 벽안 스님 등을 친견하였다.
그리고 문경 김룡사에서 성철 스님을 친견하고 3천배 정진을 한 후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주제로 법문을 들었다.
○ 봉은사에 ‘대학생수도원’ - 구도부 입사(入舍)
이렇게 시작한 대불련 구도부는 9월 ‘뚝섬 봉은사’에서 대학생수도원을 개설하고 수련 정진에
들어가 학생과 사중 수련을 병행해 나갔다. 구도부원들은 여름과 겨울방학 기간에 구도 행각과
용맹정진에 들어갔으며 선방에서는 스님들과 치열한 구도 정진을 하기도 했다.
1967년 구도행각을 벌이던 구도부원 중 박성배 지도교수, 김금태, 이진두 동문이 성철스님
문하로 출가했다.
○ 하기, 동기 구도정진 수련회 - 눈푸른 구도자들
대불련 봉은사 수도원생들은 하기, 동기 사찰수련회를 가졌다. 1966년 여름 김룡사에서
21일간의 구도 정진 수련회를 가졌다. 『이 수련회의 특징은 승가의 스님과 함께 생활하는
엄격한 승규생활이었다.
그러므로 수도원생은 일사불란의 자기 참구에 몰아적인 구도정신이 엿보였다. 동기 수련이
논강 위주의 수도생활임에 반하여, 하기 수련은 완전히 화두 공안을 척관하는 참선위주의
생활이었다. 하루의 긴긴 해를 보내는 수도생의 모습은 초췌한 감이 들어도 눈빛은 그 어느
도인의 눈처럼 맑고 빛났다.』 <대한불교 1966. 8.28자 기사>
○ 3년차부터 완전자치제 운영 - 6년간 수행자 50여명 배출
서울 봉은사에 자리한 대불련 구도부는 몇 차례의 입사생들을 모집하여 입사식을 가졌고,
졸업생 환송법회도 가졌다. 3년차를 맞이한 구도부는 봉은사 명성암에 본부를 두고 공양 등
완전 자치제로 운영했다.
청담스님을 조실로, 법정 스님, 법안 스님, 광덕 스님 등을 지도법사로, 박성배. 서돈각.
이기영. 서경수 교수 등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승려와 같은 수행을 하였다.
이후 대불련 구도부는 대학생수도원을 통해 약 50여명의 대학생 수행자들을 배출했고,
1971년까지 약 6년여 운영되었다.
● 대불련 구도부에 참여한 동문들 ●
박성배<지도교수> 이용부 이진두 김기중 김선근 김금태 전창열 황귀철 조용길 김춘송
이학용 김학진 박세일 강우중 권경술 김규칠 김재문 김영호 박문효 문창호 임동걸
강원철 임동규 도평원 김규팔 한상수
<대불뉴스레터 제17호, 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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