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자료실 1975년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기념--불교신문 보도기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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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태형 작성일2014.07.31 조회5,910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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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총무원장 경산스님<좌측>과 후일 총무원장을 지낸 정대스님의 모습이 보인다.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1975년부터다. 예수 탄신일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로 지정된 때가 1945년 미군정 당시니 30년이 늦었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은 정부가 시혜(施惠) 하듯 던져준 것이 아니라 불교계가 30년간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다. 조계종단과 신도단체 전국의 신도들이 힘을 합쳐 줄기차게 제기하고 ‘투쟁’한 끝에 얻은 쾌거다.
정부는 1975년 1월15일 오전 10시 정부 대변인 이원경 문공부장관의 담화문을 통해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발표했다. 이틀 전 당대 최고의 선지식(善知識) 전강(田岡) 스님의 입적으로 침울해있던 불자들에게 큰 기쁨이었다. 정부가 정한 공식 명칭은 석가탄신일, 날짜는 음력 4월8일이었다. 국무회의 심의는 전날 오후 열렸다. 김종필 총리가 찬성 발언을 하고 황산덕 법무장관이 동조하자 장관들 전체가 동의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1963년 통합종단 출범 직후 정부 청원 시작 10여년 노력
음력 양력 팽팽히 맞서다 신생 종단 불참하는 등 우여곡절
이 문공장관의 담화 발표 후 곧바로 종단은 환영의 뜻을 밝히는 대국민메시지를 발표했다. “정부당국과 그동안 성원을 보내준 전 국민에게 감사를 드리고 이 기쁨을 함께 하고자 한다. 비록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로써 민족문화사에 새로운 계기가 이룩될 것임을 확신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부 발표 후 전국 각 지역과 본사에서 축하 법회가 열렸다.
그만큼 기쁨이 컸다. 종단 내부 분열로 인해 동국대가 관선이사를 맞는 등 어수선한 종단 상황에서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기세를 몰아 총무원장 경산스님은 공휴 제정을 교세 확장의 계기로 삼겠다며 승려교육, 포교, 승풍진작 등 각종 종책을 발표한다. 그리고 공휴일을 맞은 첫 부처님오신날 행사가 부처님오신날인 5월18일 전국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현재 부처님오신날 일주일 전에 실시하는 제등행렬이 서울에서는 이날 오후 동국대에서 열렸다. 오후7시부터 시작된 ‘총화호국안보 국토통일 기원 제등행렬대제’는 동국대를 출발해 동대문 종로를 거쳐 조계사에 이르러 회향했다. 정부는 첫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모범 재소자 3000여명을 석방했다. 정부 발표를 이끌어낸 것은 불교계였다.
38선 이남에 주둔, 임시정부를 세운 미군정은 1945년 10월 일본이 제정한 공휴일을 모두 폐지하고 새로 제정한다.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에 포함됐다. 당시 미군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내 기독교 신자는 1%도 되지 않았다.
불교계가 부처님오신날을 공휴일로 제정할 것을 처음 추진한 것은 해방 직후 부터라는 주장이 있지만 확인은 되지 않았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움직임이 본격화 한 것은 1962년 통합종단 출범 후다. 1963년 1월 총무원이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건의문을 정부에 발송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10년 넘게 정부와 험난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총무원의 건의에 문교부장관은 ‘불가(不可)’회신을 보낸다. 이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특정한 국교가 없이 신앙이 자유인 우리나라에서는 특정종교의 기념일을 공휴일로 제정할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공휴일 제정은 범세계적인 것으로 대내외적으로 유기적 연관을 가진 현 사회실정에 비추어 공휴일로 제정한 것이다”라는 정부 답변은 국교(國敎)가 없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정부의 모순된 답변을 받은 후 종단은 본격적으로 추진 본부를 결성해 범불교적인 운동으로 전개한다. 1963년 3월1일 교구본사 주지, 중앙종회 의원 등 종단의 중진들이 모두 모이는 합동연석회의가 소집돼 청담스님을 위원장으로 추진위원을 꾸렸다. 몇 가지 실천요강을 마련했다. 명칭은 ‘불탄절의 공휴일 제정 추진운동’으로 삼고 공휴일 명칭은 ‘4월초파일’로 정했다. 초종파적으로 전개하며 전국적으로 서명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1963년 5월까지 30만명이 서명했다. 연판장을 건의문과 함께 정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1964년 부터는 원불교 법화종 진각종 등 범종단적으로 운동본부를 만들어 3월20일 다시 청담스님을 위원장으로 ‘부처님의 탄일 공휴일 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난관에 부닥친다. 음력을 주장하는 조계종과 달리 몇몇 신생 종단에서 양력을 고집한 것이다. 이견을 내포한채 우선 각 종단 대표자와 실무자들로 조직을 구성했다. 하지만 음력 추진에 불만을 품은 일부 신생종단이 불참하면서 추진 동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런 가운데 처음으로 부처님오신날 합동 제등행렬이 1964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열렸다. 1965년 다시 날짜와 명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추진위 회의가 열렸다.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음력 4월8일이 가장 많았다. 종정 스님을 비롯 교구본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주요 사찰 주지와 국회의원과 장관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역시 음력 4월8일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여론을 받들어 1965년 4월6일 추진위원회 회의에서 음력 4월8일로 결정했다.
정부 억지 부리며 제정 미루다 불자들 줄기찬 노력에 굴복
어느 특정인 아니라 당대 살았던 모든 불자들 합심한 결과
청원 건의서 등 온건한 방법으로 진행되던 운동은 1966년 동국대 대학원 법학과 석사과정에 있던 김선흥씨가 서울 고법에 홀로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 중 기독교 성탄절의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면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김 씨의 소송은 그러나 청구 취지를 잘못 정해 패소한다. 하지만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지정에서 결정적 기여를 하는 용태영 변호사가 등장하면서 새 전기를 맞는다.
1968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열린 봉축 준비회의에서 명칭을 결정한다. 그때까지 ‘부처님오신날’은 불교계 내부에서도 ‘부처님탄일’, ‘부처님탄신일’, ‘석탄일’, ‘석탄절’, ‘석가세존 탄일’ 등 사찰과 단체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었다.
1968년 3월 19일 조계종 총무원장실에서 명칭을 결정한다. 종립학교 대표, 전국신도회, 불교신문사 및 총무원의 간부 스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처님오신날’로 명칭을 결정한다. 이 명칭은 명성여고 교장을 역임한 이원주 교장이 지었다. 이 교장은 이 공로로 제13대 포교대상을 수여한다.
한동안 주춤하던 공휴일 제정 운동은 1970년 7월 총무원장에 청담스님이 선출되면서 다시 활기를 띤다. 공휴일 제정 운동에 가장 공이 큰 월주스님이 교무부장에 임명돼 운동은 더 활발해졌다. 월주스님은 1971년 9월23일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추진위원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유성범 의원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국회 차원에서 입법안으로 내기로 했다. 유 의원의 활동으로 공휴일 추진운동은 불교계 뿐만 아니라 국회인 입법부에서까지 함께하는 활동으로 진행됐다.
1973년 3월24일 용태영 변호사가 서울고등법원에 ‘석가탄신일 공휴권 등 확인 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하지만 두 번의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불교계 관심은 크지 않았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돋운 것은 법정스님이 불교신문에 쓴 사설 한편이었다.
재판이 열리는 동안 전국에서 결집한 불자들이
법원 앞에 운집해있다.
3차 심리기일을 앞두고 나온 불교신문 10월21일자 사설이 알려지자 전국의 불자들이 재판장으로 향했다. 특히 부산 대구 울산 등 경상도 불자들의 참여열기가 뜨거웠다. 10월31일 월주스님이 증인으로 참석한 3차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덕수궁 인근 법원 주변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불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1973년 12월5일 열린 제4차 심리에도 많은 신도들이 운집했다. 경찰은 갈수록 참석 신도수가 늘어나자 위협을 느끼고 고속버스를 고속도로 상에서 가로막았다.
하지만 한 겨울 버스에서 내린 신도들이 걸어가다 얼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겠다고 버티자 굴복한다. 1973년 봉축 법요식이 동양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전국 전역에 중계방송됐다. 동양방송에 근무하던 김해근씨의 노력과 총무원장 경산스님과 사장 홍진기씨의 인연이 맺은 결과였다. 방송은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전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시켰다. 이 방송은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시청했다고 한다.
심리는 11차까지 진행됐지만 각하 결정이 난다. 1973년 3월 제기돼 1974년 10월30일 막을 내렸다. 원고가 먼저 행정부에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신청을 한 뒤 그 신청이 기각됐을 때 재판을 청구해야 성립된다는 것이 재판부의 결정이었다. 소송에는 패했지만 그동안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의 필요성을 전국민에게 알리고 불자들의 단합과 범종단적 단결을 이끌어내는 큰 성과가 있었다.
얼마 뒤 1974년 11월28일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석상에서 심흥선 총무처장관이 “불교계가 청구하고 있는 석가탄신일의 공휴 지정을 정부는 신중히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에 상고한 용태영 변호사는 이 소식을 듣고 얼마뒤 소송을 취하한다. 총무원은 12월20일 국무총리, 법무부장관, 문공부장관에게 청원서를 제출한다.
26일 문공부 장관이 소관부처에서 처리중이라는 회신이 도착하고 해를 넘긴 1월14일 저녁 청와대에서 열린 야간 국무회의에서 마침내 통과됐다. 이처럼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은 전 불자들이 힘을 합쳐 일궈낸 쾌거였으며 한국불교의 단합을 촉진한 일대사였다.
[불교신문 2719호/ 5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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