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자료실 중아함경 해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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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태형 작성일2017.01.29 조회5,345회 댓글0건본문
중아함경(中阿含經)
해 제
1. 머리말
아함경(阿含經)의 성립 및 이름과 특성에 대해서는, 이미 『장아함경(한글대장경 1) 』 해제에서 설명하였기 때문에 생략하고, 여기서는 이 『중아함경(中阿含經) 』의 역자(譯者)와 구성 및 그 내용만을 간단히 적기로 한다.
2. 역자
이 『중아함경 』의 한문 번역은 앞뒤 두 차례가 있었다. 그 첫 번째 번역은 도거륵국(兜佉勒國)의 사문(沙門) 담마난제(曇摩難題 : 秦에서는 法喜라 부름)가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건원(建元) 20년(384)에 장안(長安) 성내(城內)에서,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 및 『중아함경(中阿含經) 』을 무려 1백 권을 번역해 내었는데, 『증일아함경 』이 41권, 『중아함경 』이 59권이었다고 한다.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 제 2 권에서는 "난제(難題)가 호본(胡本)을 입으로 외우고 축불념(竺佛念)이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 』 제 1 권에서는, "부견의 신하 가운데 무위태수(武威太守) 조정(趙正)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도(道)를 위해 몸을 잊은 사람으로서, 모용충(慕容冲)의 반역(叛逆)으로 관중(關中)이 시끄러웠으나, 그는 그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장안 성중에서 의학승(義學僧)을 모으고 난제를 청해 『중아함경 』 『증일아함경 』의 두 아함을 번역하게 하였다. 그 뒤에 요장(姚萇)이 일어나 서울까지 침범해 들어와 인심이 험악하게 되자, 난제는 그곳을 하직하고 서역(西域)으로 돌아갔는데, 그 뒤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이 『중아함경 』의 첫 번째 번역이었다. 그것은 양(梁)나라 때까지 전해져 오다가 그후 없어져 오늘에 전하지 않으니, 그것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는 오늘날 알 길이 없다.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 제 2 권에서는 현재 남아 있는 『중아함경 』에 대해 "담마난제가 번역한 것과는 아주 다르다"고 하였고,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 제 3 권에서는 "두 번째 번역은 담마난제의 번역과 아주 다르다"고 한 것을 보면 잃어 전하지 않는 첫 번째 번역은 현재의 두 번째 번역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두 번째 번역은 계빈국(罽賓國) 사람 구담 승가제바(瞿曇僧伽提婆 : 衆天이라고 한역)가 번역한 것이라고 전하는 이 『중아함경 』 60권이 그것이다. 제바의 전기(傳記)에 대해서는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 제13권,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 제 3권, 『고승전(高僧傳) 』 제 1권에 나오는데, 대체로 그 내용이 비슷하다. 그는 부견의 건원 연간에 장안에 와서 포교에 전념하였다. 그 당시 장안에는 석도안(釋道安)이 있어 진왕(秦王) 부견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그의 후원에 힘입어 경전의 연구와 번역 사업의 감독을 맞고 있었다. 담마난제가 『증일아함경 』 『중아함경 』을 번역한 것도 그 일부는 이 석도안의 권유에 의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출삼장기집 』 제 3 권에도 "이에 안공(安公)과 함께 『청해경 』을 출간하였다"고 적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용충(慕容冲)의 병란(兵亂)을 만나 도안은 건원 21년(385)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모처럼 번역한 그 경을 교정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 뒤에 산동(山東) 지방도 차츰 평온하게 되어, 승가제바는 기주(冀州) 사문 법화(法和)와 함께 낙양(洛陽)으로 들어가 거기서 4, 5년간 머무르면서 경전을 강하고 한어(漢語)를 공부하는 동안, 두 아함경 번역의 충분하지 못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융안(隆安) 원년(397)에 동정후(東亭候) 우바새(優婆塞) 왕원림(王元琳)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경전 번역에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가진 사람으로서, 제바를 위해 정사(精舍)를 세우고 사방의 학도들을 불러 모은 일도 있었다. 그는 양주(楊洲) 건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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